민주주의의 심장에서 철인통치를 외치다. 플라톤-<국가>

아테네, 플라톤, 그리고 민주주의

by 반쯤리뷰

‘철학자가 통치자이고, 통치자가 철학자인 국가는 행복하다.’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라 불리는 고대 아테네에서 한 철학자가 말했다. 그는 민주적으로 이루어진 재판과 투표로 인해 존경하는 스승을 잃었으며, 독재 국가였던 스파르타에게 자신의 조국이 무너지는 모습도 바라봐야 했다. 스승을 잃은 슬픔과 무너져가는 조국을 바라보던 그 철학자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 회의감은 이상 사회, 국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고민과 그 자신의 철학을 담은 책이 플라톤-<국가>이다.


<국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크게 2가지 방향성으로 글이 진행된다. 하나는 소크라테스식 변증법이라고 불리는 대화 상대에게 질문을 반복하여 진리를 찾아나가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철학적 생각을 이야기하듯이 풀어내는 방식이다. 글의 특징이라고 하자면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는 점이 있다. 아마 큰 의미는 없고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는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한다.



...위를 사용할 때는 포도나무 재배 기술이 필요하지 않겠나?“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방패나 리라를 사용하지 않고 안전하게 보관해둘 때는 정의가 필요하지만, 막상 그것을 써야 할 때는 중무장한 보명의나 연주자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모든 일에서도 무언가를 사용할 때는 정의가 필요하지 않고, 사용하지 않을 때만 정의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러네요.“

”여보게, 정의가 그런 거라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걸세. 하지만 한번 생각해보게. 권투 같은 시합에서는 공격을 잘하는 살마이 방어도 잘하지 않는가?“

..................

”그렇다면 무언가를 잘 지키는 사람이 홈치는 일도 잘할걸세.“

”그럴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람은 돈 지키는 일을 잘하니 홈치는 일도 잘할 걸세.“



책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구절이라고 한다면 ‘선한 사람은 타인에게 악하게 보이도록 행동할 것이다’라는 구절이었다. 이는 선한 사람이라면 타인에게 존경받기 위해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오롯이 타인을 위한 이타심(칸트의 관점으론 선의지)으로 선행을 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선행으로 인해 얻게 되는 이득을 위해 하는지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 선행의 결과로 자신이 얻게 될 좋은 평판, 칭찬, 혹은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는 자기 효능감 같은 것들도 선행의 동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질문한다. 그러한 것들을 위해 하는 선행은, 진정한 선행이라 할 수 있는가? 이러한 선행을 베푸는 사람을 진정 선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진정한 선행이라는 것은 그것을 그 누구도 알아주지 못하고, 또 남들에게 비난받고 손가락질 받을지언정 행하는 것이다.

평소에도 고민을 많이 하고있는 생각이기에 인상 깊게 읽은 부분으로 꼽았다. 또 기회가 된다면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지 않을까 싶다.


플라톤의 철인정치론과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로 역할을 구분 짓는 이상사회론은 플라톤-국가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아테네에 가장 저명한 철학자가 엘리트주의를 말하다니! 이는 플라톤의 생에와 배경을 생각해 보면 이해될 듯 하지만 놀랍긴 놀라운 이야기이다. 플라톤이 철인정치를 주장하게 된 배경은 위에 말했듯이 당시 아테네가 중우정치로 흘러가고 있었고, 그 여파로 국가가 쇠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민주주의로 스승을 잃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민주주의를 비판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체재가 아니다. 많은 전문가와 지식인들 또한 그렇게 말하며, 그들은 민주주의가 차악을 선택하는 체재라고 한다. 당시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문제에 대해서 말하면 그들은 당시 민주주의가 성인 남성만이 투표권을 가지는 불완전한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묻고 싶다. 지금의 민주주의는, 투표로서 대변인들을 뽑아서 그들이 민주적 의사결정을 하는 지금의 민주주의는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오히려 투표가 정책적인 민의를 반영시키지 못하고, 정당끼리의 전쟁이 되어버린 지금의 민주주의는 얼마나 민주적인 것인가.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투표하기보다 정당을 보고 투표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지금의 민주주의는 엘리트주의와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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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대선 투표를 겪으며 많은 놀라움을 느꼈다.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며 든 생각은 사람들은 정책이나 지금 현 상황에 대한 이성적인 분석보다는 선동과 조롱,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비난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비록 모두는 아니겠지만 대중들을 움직이는건 차갑고 건조한 이성이 아닌 뜨겁고 비합리적인 그런 것이었다.

우리 편의 아내가 공격당할 때는 가족을 공격하는 것이 후안무치한 악행이지만, 상대편의 약점을 공략하기 위해 가족을 비방하는 것은 통쾌한 정의인가?

보아하면 사람들은 ‘행위’자체를 평가하기보다 편을 갈라 다른 편을 악마화하기를 즐기는 듯 싶다.

이러한 성향은 극단화됨과 동시에 인터넷 발달의 영향으로, 이제는 자신들이 신뢰하는 ‘진짜 언론’에서 말하는 편향적인 정보만을 진실이라 믿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식으로 민주주의의 모순점이 발견된다면, 다른 국가들은 이런 모순이 더욱 심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민주주의는 대중의 시민의식과 지적 수준에 상당의 의지를 하는 체재이며, 우리나라는 평균적으로 매우 높은 시민의식을 지닌 국가이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나라는 해방 직후 역사가 길지 않아 부의 대물림이 일어나 계층이 분화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은 국가이다. 또한 기본교육(초-중-고)시스템이 잘 잡혀있고, 이는 교육열과 인문계 진학률에 맞물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대학 진학률과 박사 비율을 가진 국가가 되었다.


이렇게 국민이 평균적으로 교육과 생활 수준이 압도적으로 높은 나라에서도 이런 민주주의의 패단이 드러난다면 이제 우리는 차악을 선택하는 정치 체재가 아닌 더 나은, 더 완벽에 가까운 체재를 찾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보수적으로 지금 체제를 개선하는 식이던, 진보적으로 지금 체제를 갈아엎어 변화시키는 방식이던 말이다.



글은 추후 시간이 난다면 수정할 예정이다. 이런 나의 생각과 회의, 그리고 나아갈 방향에 대해 미리 한번 고민 해 본 옛 철학자의 글을 읽을 수 있어 좋은 경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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