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 키호테>. 1605년 스페인의 작가인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쓴 책으로 세계에 가장 위대한 책 중 하나로 꼽힌다. 그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 정도냐면 2002년에 노벨연구소가 주최한 최고의 책 투표에서 전 세계 유명 작가 100인의 50%이상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당당히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 리뷰를 보는 독자들도 한 번쯤 경험삼아 읽어보길 추천한다.
책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마을에서 존경받던 어른이였던 그는 기사 소설에 너무나도 푹 빠진 나머지 자신이 편력기사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착각 속에서 자신이 진정한 기사로서 거듭나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첫 모험에서 무작정 들어간 주막을 그는 성이라고 생각한다. 그 곳의 주인을 그는 영주라고 여기며 자신이 아직 정식 기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사가 되는 의식을 치러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비웃음도 당하고 조롱도 받으며 의식을 치르고 모험을 떠난다. 그러다 길에서 만난 상인들과의 갈등을 빚어 구타를 당하고 마을 농부에게 발견되어 마을로 돌아간다.
이후 그는 마을의 순진한 농부인 ‘산초 판사’를 설득하여 자신의 종자로 삼고 다시 모험을 떠난다. 그는 무작정 발길 닿는 곳으로 향하면서 그 유명한 풍차와 결투를 하기도 하고, 길에서 만난 산양치기들과 어울리다 사랑에 슬픔에 빠져 자살한 청년에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모험을 떠나는 와중에도 그는 행인이나 상인들을 공주를 핍박하는 악당들로 오해하여 공격하거나, 시련에 빠진 사람을 보고 자신 또한 그를 흉내내기도 한다.
이렇게 기사도 이야기에 빠져 환상 속에서 위험천만한 모험을 지속하고 있던 그에게 마을의 이발사와 신부가 찾아와 그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의 기사도 이야기에 말을 맞추어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그를 위해 지어낸 이야기에 주변인들이 도와주기도 하고, ‘돈 키호테’가 친 사고들을 수습하기도 하며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과 그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또 그러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람들에 관점, 특히 이상을 이야기하는 우리들의 주인공 ‘돈 키호테’와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을 가진 순박한 ‘산초 판사’의 평가와 판단을 들으며 어찌저찌 우당탕탕 마을로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책에서 ‘돈 키호테’는 광인으로 묘사된다. 포도주를 보관해둔 자루를 거인의 얼굴이라 생각해 검으로 베어버리는 일이나, 행인들을 악당이라 여기고 공격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이니 말이다. 그는 확실한 광인이다.
그는 자신만에 환상속에 산다. 그는 자신이 편력기사라고, 자신은 사랑하는 공주님을 위해 모험을 떠난다고 굳게 믿는다. 그는 자신이 마주한 풍차가 거대한 거인이라고 굳게 믿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이 그를 광인으로 보이게, 또 실제로 그러하게 만들었다.
그는 너무나도 기사를 사랑했다. 기사에 대한 소설을 사랑했으며 기사도 이야기에 푹 빠진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광인은 별다른 것임을 세삼 생각했다. 그저 자신만의 생각이나 믿음이 있으면, 또한 그것이 확고하면 확고할수록 광인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린 모두 무엇인가에 빠져 본 경험이 있다. 어떤 환상에 매몰되는 경험들이 있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거나 운동에 빠지거나 스스로에게 빠지거나. 소설에 빠지거나 공부에 빠지거나 술에 빠지거나.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빠진 경험이 있는 것이다.
어떤 일에 빠진다는 것은 그 일에 가치를 믿는다는 것이다. 기사도에 깊은 의미가 있다고 느낀 ‘돈 키호테’처럼 말이다.
사랑에 가치를 믿기 때문에 사랑에 빠질 수 있다. 그 가치를 숭상하기 때문에 일이고, 자신의 삶이고, 가족이고 모두 내팽개치고 그토록 사랑에 매몰될 수 있는 것이다.
운동에 가치를 믿기 때문에 운동에 빠질 수 있다. 고통스러운 단련의 시간 속에서도 이 이후에 느낄 성취와 단련을 견디는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행복의 쾌락으로 바꿔 주는 것이다.
소설에 가치를 믿기 때문에 소설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은 정도를 지나처 자신을 소설 속 인물과 동일시하거나 말투나 행동을 흉내내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베르테르의 슬픔에 동조되었던 그대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은 훌륭한 ‘돈 키호테’의 후예들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주인공에 죽음에 따라서 권총 자살을 선택한 수많은 젊은이들은 우리들의 시선에서는 광인이다.
자신들의 몸을 해처가며 운동을 하고, 그것에 과도한 행복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 또한 누군가에겐 광인으로 보일 수 있다.
소설에 빠져 대인관계에 소홀하고 그것에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 또한 누군가에게 광인이다.
이념에 빠져 특정 집단을 지지하는 사람들 또한 누군가에게는 광인이다.
자 이제 ‘돈 키호테’를 다시 보자.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광인인가?
그는 우리들과 같이 무언가에 빠졌다. 기사도의 가치를 믿고, 자신이 그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의 믿음은 관점을 만들었으며 세상을 만들어주는 시야를 만들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악당과 기사, 선과 악의 세계였으며 그는 그 세계의 영웅이였다. ‘돈 키호테’는 주변에서 어떻게 바라보든, 실제 세상이 어떻든 자신은 정상임을 굳건히 믿고 있었을 것이다.
‘돈 키호테’는 광인이 아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일 뿐이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로 모두들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생각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권총 자살을 선택한 그들 또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들은 느껴본 적 없는가? 특정 주제나 이야기에 이상하리만치 과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이나 무던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경험을 말이다. 혹은 스스로도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 무언가에 깊게 빠져있는 경우를 말이다.
아이돌에 빠져 대화를 나누다 친한 친구와 갈등을 겪고, 크게 싸우거나 공격하는 경험을 해 본 적 없는가?
특정 인물에게 빠져 누군가의 말은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따라 본 적 없는가?
특정 사상에 빠져 반대편의 의견은 들리지조차 않아 본 적 없는가?
‘도덕’에 빠져 ‘악인’들의 목소리는 들어보기조차 안 해 본 적 없는가? 그리하여 ‘악인’들에게 돌팔매질, 매질, 뭉둥이질, 채찍질에 망설임이 없고 조롱과 비난을 서슴치 않아본 적이 없단 말인가.
우리는 특정한 믿음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인생이란 끝없는 마라톤과 같고 믿음 없이는 이 절망스러운 사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믿음을 갈구한다. 환상속에 살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이 삶에 어떠한 가치라도 있음을 간절히 믿는 것이다.
‘돈 키호테’는 광인이다. 우리와 같은 무언가에 빠진, 광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돈 키호테’가 될 수밖에 없다. 믿음이 환상을 만들고, 환상이 광인을 만들기에 우리 모두 광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광인이 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딱 하나의 이야기만 더 하고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믿음이 환상을 만들고, 또 광인을 만든다면 나와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보일까?
‘돈 키호테’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설득할 수조차 없다. 이미 자신만의 확고한 믿음과 환상에 빠져 자신만의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돈 키호테’는 이해할 수 없는 광인으로 비추어진다.
불가능한 꿈을 꾸고, 불가능한 적과 싸우는 것,
용기가 없는 곳으로 달려가고, 닿을 수 없는 별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나의 운명이다.
우리 세상은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미치광이 광인]으로 만든다. 우리는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화합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글에서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진정한 화합은 믿음을 배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랑은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믿음을 의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그대 광인들이여. 당신들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