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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취하게 하는 것

남도의 맛, 멋 

by 수련 Feb 19. 2025

2001년 5월 20일 혀끝을 스치는 강렬한 기억 하나. 그것은 마치 세찬 바람처럼 다가와 내 미각을 흔들어 놓았다. 처음에는 낯설고 두려웠다. 그러나 그 바람 속에 숨은 깊은 향과 맛을 깨닫고 난 후, 나는 서서히 그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린 시절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시골에서 자랐다. 주로 밭에서 키우는 채소와 산나물 등이 반찬으로 나왔고 지금은 흔한 계란찜이 귀한 어려웠던 시절이다. 생선으로는 조기, 꽁치, 고등어가 익숙했다. 생선은 조림과 구이로 식탁에 올랐고, 탕이라면 동태 매운탕이 전부였다.      


내 나이 40이 넘은 봄날, 아이들의 초등학교운동회에서 마주한 낯선 음식 하나. 처음에는 그 향에 압도되어 아이들은 코를 틀어막고 방방 뛰었다. 그러나 나는 그 냄새 속에 숨은 깊은 이야기를 알지 못한 채, 실고추와 통깨가 뿌려진 생선찜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처음 먹어본 생선찜 맛은 향이 짙고 시간이 빚어낸 맛이었다. 순이 어머니의 정갈한 손맛이 만든 찰밥과 겉절이, 그리고 생선찜은 삭힌 홍어찜이라고 내 앞에 놓여있었다. 낯설었지만, 낯설기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음식이 너무 맛있다고 이구동성으로 칭찬하였고 순이 엄마는 남도 음식을 해주겠다며 같이 있던 딸아이 친구 엄마 4명을 집으로 초대했다.      


집에 초대받은 날 임금님 수라상 같은 남도의 푸짐한 잔칫상을 마주했다. 다시 만난 홍어로 만든 음식이 그제야 비로소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홍어 삼합, 찜, 애탕, 낙지탕탕이, 박대 조림 등등 남도의 음식이 한 상 가득했다. 애탕은 홍어 내장과 된장, 보리 순을 넣고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인 음식이다. 홍어에 관한 다양한 요리는 모두 난생처음 접하는 음식이었다.      


내가 살던 충남 당진에는 홍어와 비슷한 간자미라고 부르는 생선이 있다.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맛은 전혀 다른 맛이다. 간자미는 반건조하여 양념간장을 끼얹어 쪄먹는 간자미찜, 초고추장 양념으로 만든 간자미 회무침을 어른들은 술안주로 즐겨 먹는다.      

     

목포에서 홍어를 삭혀 판매하는 순이 엄마의 친정집 덕분에 경험할 수 있는 행운이었다. 붉은색의 쫀득한 식감의 삭힌 홍어회는 귀한 음식이라고 했다. 쿰쿰한 향은 마치 오래된 서책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냄새와 비슷했고, 첫맛은 혀를 일깨우는 칼바람 같았다. 초고추장을 듬뿍 찍어 눈을 질끈 감고 삼켰다. 목 안에서 밀려오는 코끝이 뻥 뚫리는 쏘는 향과 처음 느끼는 맛은, 좋아할 수 없는 이상한 맛이었다.      


순이 엄마는 처음 접하는 나에게 먹는 방법을 가르쳐주면서 처음에는 무, 미나리, 오이 등을 섞어 아삭하게 무쳐낸 홍어회 무침을 먹으라고 했다. 채소와 곁들여 먹으니 새콤달콤한 양념과 쫄깃한 식감이 오들오들 특유의 강한 향이 느껴지지 않으며 맛있었다.      


홍어회 무침은 썬 홍어를 막걸리에 담갔다가 바락바락 주무르고, 베주머니에 넣어 물기를 꼭 짠다. 꼬들꼬들한 홍어에 양념 초고추장과 채소를 넣고 무쳐내면, 호불호 없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남도 향토 음식이다. 애탕은 그 향을 뛰어넘는 깊이를 품고 있었다. 먹을수록 차츰 알 수 없는 홍어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홍어에 입문하고 특별한 맛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홍어의 맛을 소개하면서 초보자에게는 홍어회 무침을 권했다. 숙성기간에 따라 향과 맛이 다르다고 친절하게 설명하며 차츰차츰 깊은 맛을 즐겼다. 수원에는 농수산 시장 사거리 홍어 삼합이 유명한 A라는 맛집이 있다. 남도의 음식이 생각나는 날 좋아하는 친구들과 일부러 찾아가는 마니아가 되었다.     


남도의 삭힌 홍어 유래는 냉장 시설이 없던 시절, 어부들이 먼바다에서 애써 잡은 생선을 육지의 어시장까지 가기 전 상해 버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맛이 갔어도 먹고 배탈이 안 나는 생선이 바로 홍어였다고 한다. 그 후 별미로 홍어를 항아리에 넣어 숙성기간에 따라 다른 맛을 즐기며 먹었다고 한다. 삭힌 홍어 얘기는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나오는데 "나주인들은 삭힌 홍어를 탁주 안주로 즐겨 먹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오래된 발효음식이다.     


홍어는 기다림의 음식이다. 급하게 먹어서는 안 되는 것,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항아리 안에서 볏짚에 쌓여 숙성해야 비로소 제맛을 내는 것. 홍어를 먹을 때면 시간이 만든 풍경을 떠올린다. 장독대에 차곡차곡 쌓인 세월, 손끝에서 탄생하는 정성, 그리고 깊은 맛 속에 숨은 이야기. 홍어를 처음 접했을 때는, 평생 처음으로 느끼는 암모니아 향에 진저리를 치며 놀랐지만, 이제는 그 향이 없으면 허전하다. 마치 길을 가다 스며든 익숙한 바람처럼, 어느 날 불현듯 생각나는 맛이 되었다.     


홍어는 함께 나누는 음식이다. 봄, 가을, 수영장 동아리 모임에서 야유회를 떠난다. 동아리 회장님이 목포 출신이다. 그 소풍 자리에는 늘 홍어가 있다. 전라도 사람들에게 홍어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결혼식이나 제사 등 큰 잔치와 같은 경사스러운 날에 빠질 수 없는 특별한 음식이라고 한다.      


내가 다니는 연습장에 ‘호수회’라는 모임이 있다. 호남이 고향인 수원 사람들의 모임이다. ‘호수회’의 운동회 행사에 초대받았을 때 처음에는 동향도 아니고 억센 사투리가 거슬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고민하다 참여했지만, 이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매년 참석한다. 


초대에 참석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의 하나는 적당하게 숙성된 좋아하는 선홍색의 홍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따뜻한 손길 속에서 홍어의 깊은 맛을 배우고, 함께 나누는 법을 익혔다. 삭힌 홍어 한 점에 수육 한 점, 그리고 묵은지 한 점. 세 가지가 하나의 맛을 이루는 홍어 삼합과 막걸리 한잔은 인생의 조화로움과도 같다.     


나는 이제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홍어로 만든 음식에 빠져있다. 시간이 만들어낸 깊이, 함께 나누는 따뜻함, 그리고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첫맛의 강렬함까지. 처음에는 두려웠던 그 칼바람 같은 맛이 이제는 나의 최애 음식이 되었다. 가끔 목포로 삭힌 홍어와 탁주 한잔, 낙지탕탕이를 만나러 간다. 어쩌면 삶이란, 처음에는 낯설고 버거운 것들도 결국에는 하나의 풍경으로 스며드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홍어의 유별난 향처럼, 그 강렬한 인상이 내 마음을 빼앗은 그날, 문득 나를 감싸오는 순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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