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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식사

6강 간결하게 글쓰기

by 수련


가을걷이가 끝나고 초겨울 찬 바람이 들판에 내려앉는 철이 되면 농사지은 참깨와 들깨자루를 갖고 엄마와 함께 방앗간으로 향하곤 했다. 볶아지는 참깨 냄새가 골목을 따라 퍼지고, 투명하고 노란 기름이 줄줄이 흘러내리는 신통한 모습을 보며 기다리는 동안 김이 펄펄 나는 팥시루떡 한 조각을 나눠 먹고, 짜장면을 시켜 후루룩 비우던 그 순간들이 이제 와 돌이켜보면 참으로 고소하고 큰 행복이었다.


엄마는 그런 날이면 환한 모습으로 많이 웃으셨다. 막내딸이 보내는 용돈, 여름마다 사드리던 잠자리 날개 같은 얇은 옷을 입고 노인정에 가셔서 자랑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미처 알지 못했다. 딸의 소소한 선물 하나에도 마음이 차고 넘치던 분이었다는 것을.


일제강점기라는 억센 시간을 지나오며 일본말과 한국말을 뒤섞어 배우고, 어린 시절 외우던 일본어 숫자를 손주들에게 들려주며 옛날 얘기를 하던 엄마. 비릿한 해산물을 좋아하던 엄마를 위해 아버지가 특별한 날 당진포구에 가셔서 조기와 칠게를 사 오셨고, 작은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까만 칠게가 기름에 튀겨 붉게 물들면 우리는 그것을 간식 삼아 아작아작 베어 먹었다.


간혹 함지박 가득 사 온 커다란 꽃게를 큰 솥에 삶아 껍질을 벗겨 속살을 내어주던 엄마의 손은 늘 따뜻하고 부지런했다. 비법 간장을 끓여 부어 간장게장을 만들어 주셔서 게딱지에 밥을 비비고 간장 조금 넣어 주면 게눈 감추듯 밥그릇을 비우곤 했었다. 어느 날 주홍빛 삶은 꽃게를 먹고 식구들이 배탈 난 이후 꽃게는 우리 집 식탁에서 사라졌고, 바다 냄새는 한동안 가족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삶은 언제나 달콤한 뒤편에 조용한 그림자를 준비해 두고 있는 듯했다.


세월이 흘러, 엄마는 아픈 며느리를 대신해 어린 손주 둘을 돌보며 지내게 되었다. 밤낮으로 살림을 챙기고 아이들을 보살피는 동안 자신을 돌보는 일은 뒤로 밀렸고, 결국 몸은 점차 약해져 어지럼증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그날도 입원하고 계신 날밤, 처음으로 엄마가 전화를 하셔서 간장게장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평생 “괜찮다, 필요 없다”라고 말하던 분의 요청이었기에 수소문 끝에 새벽에 연평도 꽃게 집 문을 두드렸고, 사정이야기를 하고 간장게장을 준비하여 병실로 향했다.


쌀밥에 게장을 비벼 떠 드렸다. “참 맛있다”라고 밥 반공기를 오랜만에 드셨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혀있던 삼만 원을 내밀며 “네가 해준 게 많으니 이건 받아야 한다”라고 주셨다. 그 순간 그 말의 무게를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엄마 왜 안 하던 짓을 해요”라고 말했을 뿐. 그것이 마지막 식사가 될 줄 몰랐다.


이틀 뒤 엄마는, 아주 낮은 숨결을 끝으로 눈을 감으셨다. 77년 고단한 삶이라는 긴 여정을 조용히 놓아버린 듯한 편안한 얼굴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엄마가 찾았던 간장게장은 음식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딸에게 남기고 싶던 따뜻한 인사였다는 것을. “고마웠다”는 이 말.


초겨울의 바람이 매서워질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곳에서 엄마는 아버지와 다시 만나, 아프지 않은 몸으로 편안히 웃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엄마가 떠나고 시간이 지나서야 속 깊은 사랑을 뒤늦게 이해한 딸은 오늘도 엄마를 기억하며, 그 기억 속에서 다시 한번 작게 숨을 고른다. 기억한다는 것은 이어서 같이 살아간다는 뜻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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