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교사 추천서
사랑하는 애인에게 쓰는 편지, 부모님께 쓰는 감사 편지 등 글에는 여러 감정과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 글 중에서 작가의 글은 새와 같습니다. 공작새같이 화려하게, 독수리처럼 날카롭고도 매서운 문체로 우릴 현혹시키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쓴 글과 일반적인 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새`이기에 먹이를 잡아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즉, 작가의 글은 돈을 물어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글도 때론 새가 되어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저는 대학생 때부터 알바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의 알바시장은 중고 신입을 바라는 현재의 취업시장과 유사했습니다. 알바 경험이 없는 제가 뽑히기 위해서는 이력서를 누구보다 잘 적어야만 했습니다.
저의 이력서를 돈을 물어오는 새로 만들기 위해 한 가지 마법을 부렸습니다. 그것은 글쓰기를 넘어선 `글짓기`입니다. 글짓기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마법이자, 빈약하고 초라한 자재들을 모아 근사한 건물을 지어내는 건축학입니다.
알바 경험이 없는 제게 들려있는 빈약하고도 초라한 자재로 얼마나 근사한 건축물을 만들어냈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저를 꼭 뽑아주세요. 편의점 알바 경험은 없지만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담배를 종류별로 태우시기에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담배종류를 다 외우고 있습니다. 에쎄 수 초록색, 에쎄 체인지, 디스, 한라산까지 편의점 담배 위치만 파악하면 바로 꺼내드릴 자신 있습니다.
학교에서 청소를 잘한다고 선행상도 받았습니다. 밀기면 밀기, 쓸기면 쓸기 깔끔하게 매장을 관리해 놓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성실성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죽어도 학교 가서 죽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개근상을 받았습니다. 죽더라도 편의점에서 죽는다는 각오로 빠짐없이 출근하겠습니다.
제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은 빨리 습득하여 일에 차질 없도록 만들겠습니다! 알바를 해본 경험이 없다는 게 단점이 아닌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얀 도화지 상태이기에 고집 없이 배우는 대로 습득할 수 있습니다. 꼭 뽑아주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알바 업무와 최대한 관련 있어 보이는 담배이름, 선행상, 개근상과 같은 빈약한 자재들을 모아다가 나름 근사한 건물을 지어냈습니다.
결과는 편의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경력이 많은 지원자들도 있었지만, 이력서에 열정이 보여서 뽑았다고 해주셨습니다.
알바 이후에는 돈을 물어와야 할 글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제게 마법의 `글짓기` 욕구를 샘솟게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종례를 끝내고 동태눈깔로 업무를 하고 있다가, 퇴근 30분 전쯤 전화가 울렸습니다.
선생님 퇴근 전에 죄송합니다. 선생님 반 000 학생이 장학생 추천 명단에 올라왔더라고요. 한번 확인해 보시고 담임교사 추천서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의지가 불타올랐습니다. 그래 나 요즘 브런치에 열심히 글도 쓰고 있겠다, 000은 모범적인 부반장이기도 하니까 꼭 장학생이 되도록 글을 써주자!
마음은 먹었는데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막막했습니다. 참고할 예시도 없었고, 수여 목적도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려온 공문을 열고 천천히 단서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1. 선행상
2. 주최 재단
두 개의 단서를 찾아내고 글의 방향을 대강 잡아두었습니다. 마법의 글짓기도 자재는 필요하기에 학생을 불렀습니다.
째선생: 000아 너의 평소 행실이 너무 좋고, 선생님들한테 깍듯해서 장학생으로 추천하려고 해. 근데 선행상이다 보니까 봉사나 기부 같은 거 한적 있니?
학생: 저요? 음.. 기부는 해본 적 없고, 봉사는 학교 주변에 쓰레기 치우는 프로그램에 참석했었습니다!
째선생: 혹시 더 생각나는 건 없고?
학생: 네.. 끝입니다.
이런.. 자재가 빈약했습니다. 마법의 글짓기를 준비해야겠네요.
우선 바닥을 단단히 다지기 위해 재단 사이트부터 들어갔습니다. 재단 소개에 나와있는 재단의 이념을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재단의 이념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을 베푸는 `자비`였습니다.
이제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자비라는 바탕 위에 부반장, 쓰레기 줍기 프로그램이라는 자재를 가지고 멋진 건축물을 지어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알바 지원서를 썼을 때의 저보다는 자재들이 훌륭했기에 한결 편하게 글짓기를 해 나갔습니다. 필요 없는 수식어는 과감하게 빼고, 맞춤법 검사까지 마친 후 담당선생님께 전달하였습니다.
그렇게 일주일 후 결과가 공개되었습니다! 결과는 기쁘게도 장학생으로 선별되었습니다! 제 돈은 아니긴 하지만 돈을 물어다준 두 번째 글쓰기가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학생과 감사하다는 학부모님의 전화는 글쓰기 잘했다는 보람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제 글이 더 많은 사람의 행복을 물어다 줄 수 있게 키워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