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함께 했던 시간 (~1993)
어린아이 김지훈은 늦은 밤에 피아노학원 생활 공간 2칸에서 홀로 눈을 뜨는 일이 잦았다.
그 날도 눈을 뜨니 창밖은 어두웠고, 바깥 피아노학원 공허한 공간은 더욱 칠흑이었다.
이윽고 직감한다. 여기 나 홀로 남겨져 있다고.
“엄..마?" 대답이 없다. "엄!!!! 마!!!!” 다급하게 외치며 눈물이 터진다. 돌아오지 않을 대답에 더 이상의 무의미한 소리침은 멈추고, 아주 조용하고 숨죽인 탈출을 계획한다. 피아노학원 칠흑 공간에 절대 눈을 마주쳐서는 안 되는 베토벤 초상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험상궂은 눈빛의 베토벤 마귀에게 나의 움직임이 들키면 안 되었다. 베토벤 눈동자가 나를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숨을 멈추고 소리 나지 않게 조심히 뛰었다. 잔뜩 겁에 질린 어린아이가 혼자 있는 것을 들키면, 베토벤이 액자에서 두 손을 꺼내어 나를 잡으려고 시도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베토벤을 넘어 현관까지 신속하게 이동한 나는 망태할아버지를 마주친다. 머리에 새하얀 구렁이가 수십마리 달려 있는 음악의 아버지 바흐의 초상화이다. 부모님 말씀을 안 들으면 망태기에 싸서 데려 가는 그 망태 할아버지의 표정과 바흐 초상화의 이목구비는 참으로 겹쳤다. 망태할아버지 앞에서 바짝 몸이 얼어붙은 나는, 입속에 머물러 있는 비명을 삼키고 또 삼킨다. 비명을 질러 베토벤까지 데려오면 안 되니까. 굳어 버린 손은 현관문 손잡이를 여러번 헛돌린다.
결국 탈출에 성공한 나는 상가 계단을 맨발로 뛰어 내려가 가장 가까운 화장품 가게로 들어간다. 화장품 가게 아주머니는 헐레벌떡 들어온 나를 보고 “엄마 오늘도 집에 없어?”라며 그제서야 안심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나를 토닥인다. 아주머니의 진한 붉은 루즈도 누군가를 잡아먹은 것은 아닐까 무서웠지만, 그래도 엄마와 알고 지내는 어른이고, 조잡하게 화장품이 비치되어 있는 익숙한 광경이 나의 불안한 심정을 점차 안정시켜주었다.
홀로 잠에서 깬 또 다른 날이었다.
그날의 나는 전화번호를 누르고 수화기를 들 줄 아는 아이었고, 제법 침착하게 친할머니네 집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할머니 목소리가 들리면 울음이 터진다. “할머니 빨리와! 나 혼자에요. 빨리 데리러와!” 울부짖으며 전화를 끊는다. 수화기를 내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베토벤과 바흐가 들어올 것 같아 다시 전화를 걸어 할머니에게 소리친다. "할머니 어디야? 뛰어 오는거에요?" 할머니는 고모가 부리나케 떠났으니 금방 도착할 거라고 위로한다.
그러나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고모가 늦게 올 것을 아는 베토벤과 바흐가 초상화 액자에서 기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으으으 떨리는 울음을 간신히 입에만 머금고 절대로 앞만 보며 질주한다. 현관문 앞에서 문고리를 철컥거릴 때에는 망태할아버지가 씨익 웃고 있다. 탈출에 성공한 나는 현관문을 쾅 닫으며 상가 반층에 위치한 공용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벌벌 떨며 운다. 공용화장실 작은 칸이 피아노 학원보다는 안전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졸리기도 하다. 그 때 고모가 문을 열고 우는 나를 안아주며 다독였다. 멈춰지지 않는 딸꾹질 울음이 계속 새어나왔고, 보름달이 환한 밤하늘 아래에서 고모의 손을 잡고 안전한 밤길을 걷는다.
오늘날도 가끔 나는 피아노학원에서 탈출하는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