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여행기 2일차 (2025. 05. 14.)
싱가포르는 마치 도심 속 정원 같았다.
빛으로 가득 찬 도시이면서도, 동시에 거대한 숲을 품고 있다.
둘째 날은 그 빛과 초록의 조화를 한층 더 깊게 느낄 수 있었다.
도시 곳곳을 살펴보다 보면 '횡단보도'가 눈에 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개의 흰 가로줄이 선명하게 길을 가르지만,
이곳은 세로 점선으로 경계만 살짝 그어져 있었다.
처음엔 횡단보도가 보이지 않아 무단횡단을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기도 했다.
그러다 천천히 건너는 사람들을 따라 발을 내딛으며, 이 낯선 횡단보도도 어느새 익숙해져 있었다.
아침밥 먹으러 찾은 곳은 야쿤 카야 토스트.
워낙 유명한 체인이라 지점이 많았지만, 우리는 차이나타운 지점을 선택했다.
카야토스트 오리지널 세트 2개를 주문했는데, 다행히 사람이 많지 않아 바로 받을 수 있었다.
세트에는 커피와 반숙란이 함께 나온다.
이 반숙란에 간장과 후추를 넣어 잘 섞은 뒤, 카야토스트를 찍어 먹는 것이 정석이다.
사실 '반숙란'이라기보다는 거의 날계란에 가까웠다.
우선 카야토스트 본연의 맛을 느껴보고 싶어서 그냥 먹어봤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달콤해 첫입부터 매력적이었지만, 계속 먹다간 조금 물릴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엔 반숙란에 찍어보니 빵이 더 부드러워졌고,
바삭한 식감은 그대로 남아 있어 식감이 한층 좋았다.
간장의 짭짤함과 카야잼,버터의 달달함이 어우러지며 풍미가 훨씬 깊어졌다.
"괜히 싱가포르 대표 아침 메뉴가 아니구나" 싶었고,
싱가포르에 산다면 아침마다 찾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은 뒤, 싱가포르를 찾은 관광객이라면 한 번쯤 들른다는 머라이언 공원으로 향했다.
싱가포르의 상징인 머라이언 상이 입을 활짝 벌리고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그 물줄기를 받아먹는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었고,
나도 북적이는 인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적당한 각도를 찾은 뒤 인증샷을 남겼다.
공원 곳곳에서는 각자 개성 있는 포즈로 머라이언과 함께 사진을 남기는 사람들이 많아,
그 모습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꽤 즐거웠다.
우연히 2층 버스를 탈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올라탔다.
사실 2층 버스는 한국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어
특별한 경험이라고 하긴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이번이 생애 첫 2층 버스 탑승이었다.
그 때문인지 익숙한 거리 풍경도 한층 다르게 보였다.
심지어 운전석이 보이지 않아 마치 혼자 미끄러지듯 달리는 느낌, 그 낯섦조차 신기하게 다가왔다.
버스에서 내려 걷다 보니 강가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왜 저렇게 누워 있을까?"
친구와 궁금해하며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외국인 남성이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저 사람들이 왜 길거리에 누워 있는지 아세요?"
나도 모른다고 고개를 저였고, 우리는 그들이 노숙자인지,
혹은 일하다 잠시 쉬는 노동자인지 잠깐 대화를 나눴다.
알고 보니 싱가포르의 이주 노동자들은 열악한 처우 탓에
쉴 공간조차 제대로 제공받지 못해 이렇게 길거리에서 휴식을 취하곤 한다고 한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독일인이었고,
서로의 여행 일정과 예전에 다녀온 장소에 대해 짧게 얘기했다.
5~10분쯤 지나자 그는 멀리서 기다리는 아내를 찾으러 가야 한다며 웃으며 인사했다.
길 위의 풍경을 둘러보는 걸 좋아하지만 아내는 그렇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서투른 영어로 나눈 짧은 대화였음에도, 그래서인지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어느 순간부터 시야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나무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 가든스 바이 더 베이에 도착했다.
싱가포르의 대표 랜드마크이자 거대한 정원인 이곳은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우리는 그중 클라우드 포레스트로 발길을 옮겼다.
입구를 지나자 시원한 공기가 몸속 깊이 스며들었고,
울창한 잎사귀 사이로 쏟아지는 거대한 인공 폭포가 우리를 맞이했다.
확실히 우리나라 식물원과 견주어도 이곳의 초록은 훨씬 짙고 풍성했다.
식물원이라기보다 진짜 숲속을 거니는 듯했고,
고요히 깔린 음악이 자연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순간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일어났다.
클라우드 포레스트를 천천히 둘러본 뒤, 우리는 플라워 돔으로 발길을 옮겼다.
클라우드 포레스트가 초록빛으로 가득했다면, 이곳은 이름 그대로 꽃의 향연이었다.
크게 인상적인 공간은 아니어서 가볍게 한 바퀴 둘러보던 중,
꽃을 모델 삼아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었다.
붓질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캔버스 위에 차분히 색을 쌓아가는 모습이 유난히 인상 깊었다.
거리를 걷다 보면 오래된 건물들 너머로 반짝이는 유리 빌딩들이 솟아 있는 풍경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조화롭기보다는 서로 다른 시간이 겹쳐져 있는 듯한 느낌.
그런 장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 도시가 지나온 시간들이 고스란히 실감된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찾은 곳은 맥스웰 푸드 센터였다.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는, 싱가포르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치킨 라이스를 맛보기 위해서다.
가게 이름은 티안티안 하이난 치킨라이스.
원래는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식당이었지만,
미슐랭 빕 구르망(Bib Gourmand)에 선정되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역시나 명성답게 웨이팅 줄이 꽤 길었지만 조리가 빠르게 이뤄져 생각보다 금방 음식을 받을 수 있었다.
너무 기대가 컸던 탓일까.
막상 맛을 보니 치킨 라이스는 생각보다 평범했고, 어딘가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도 현지인들이 일상처럼 즐긴다는 말처럼 부담 없이 편하게 먹기 좋은 음식이라는 건 확실히 느껴졌다.
숙소에서 잠시 쉬며 체력을 충천한 뒤, 마리나 베이 샌즈 쪽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헬릭스브릿지' 라 불리는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이중 나선 구조가 독특해 꽤 인상 깊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마주한 미술관 건물은
손가락을 펼친 모양 같기도, 꽃잎이 겹쳐진 모습 같기도 했다.
외관이 흥미로워 한참 바라보다가,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발걸음을 이어갔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유리로 장식된 거대한 쇼핑몰이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마리나 베이 샌즈였다.
쇼핑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서 겉보기엔 여느 백화점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졌지만,
돔 형태의 유리 천장만큼은 유독 눈길을 끌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순간, 예전에 서유럽을 여행하며 걷다 마주쳤던 어딘가의 돔 천장이 문득 떠올랐다.
기억은 흐릿했지만 그때의 공기와 감각이 잠시 되살아나는 듯했다.
싱가포르 여행의 하이라이트를 꼽으라면 단연 크루즈 탑승일 것이다.
노을 진 하늘과 도시의 모습이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답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터라 기대가 더욱 컸다.
7시가 되자 우리가 탈 크루즈가 부두에 닿았고, 차례대로 승선했다.
점차 파란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드는 사이, 배는 잔잔히 앞으로 나아갔다.
크루즈에서는 걸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싱가포르의 전체적인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낮에 걷던 거리도 밤이 되니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싱가포르는 밤에 봐야 더 아름답다"는 말이 이 순간만큼은 정말 실감났다.
크루즈를 약 40분 정도 탄 뒤, 8시 정각에 시작하는 스펙트라 분수쇼를 보기 위해 이동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우리도 서둘러 자리로 향했다.
8시가 되자 음악이 흐르며 쇼가 시작됐다.
격정적인 장면과 서정적인 순간들이 어우러져, 마치 한 편의 이야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Merry Christmas, Mr. Lawrence가 배경음악으로 흐르던 순간,
그 곡이 분수의 움직임과 어우러져 더 깊은 여운을 남겼다.
분수쇼가 끝난 뒤, 우리는 서둘러 가든스 바이 더 베이 쪽으로 향했다.
8시 45분부터 시작되는 슈퍼트리 쇼를 보기 위해서였다.
마리나 베이 샌즈 건너편에 위치해 있어 다리를 건너는 길,
멀리서부터 슈퍼트리들이 은은하게 빛을 내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쇼였기에, 그 순간의 빛 하나하나가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다채로운 빛으로 가득한 슈퍼트리들 사이로 들어서자, 마치 판타지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슈퍼트리 곳곳에서 빛이 리듬에 맞춰 반짝이기 시작했을 때의 모습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다.
처음에는 앉아서 봤지만, 생각보다 전체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망설이다가 결국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바닥에 누웠다.
그러니 여러 개의 슈퍼트리가 한눈에 들어오면서 더 풍성하게 느껴졌다.
까만 하늘 위로 별들이 춤추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쇼를 다 보고 난 뒤, 싱가포르에서의 마지막 밤을 장식하기 위해 라우파삿 사테거리로 갔다.
이곳은 꼬치구이와 맥주로 가득한, 야시장 같은 분위기의 먹거리 공간으로
낮보다 밤에 오면 훨씬 더 활기찬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우리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7번 포장마차에서 사테 몇 개를 주문했다.
아무리 유명한 곳이라도 막상 가보면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지만, 여기는 정말 맛있었다.
고기의 질감은 갈비 같기도 했고, 은은하게 배어 있는 향신료 향은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맛이라 오히려 더 인상 깊게 다가왔다.
정말 만족스러운 싱가포르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도시의 빛과 자연의 녹음을 따라 걸으며, 싱가포르가 가진 매력을 천천히 담아본 하루였다.
누군가는 빛으로 가득한 공간을,
누군가는 초록의 자연을 더 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더 아름다운 순간은 서로 다른 성질의 '빛'과 '초록'이 한곳에 모여 조화를 이룰 때 찾아온다.
그 조화를 가장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곳, 바로 싱가포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