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적은 인원과 여러 갈등 상황 속에서 나의 직장생활은 아슬아슬한 곡예를 이어갔다. 그런 가운데 타인들과 달리 내가 빠릿빠릿한 편이 아니라는 걸 체감했던 순간은 이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입사 후 며칠이 지났을 때 일어난 일이다. 부장이 회사에서 판매할 제품군을 늘리기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던 중 4종류의 비누 샘플을 사무실로 가지고 왔다.
“이게 우리가 판매하는 식물 향하고 비슷해서 같이 팔아보면 어떨까 하고.”
'식물 매장에 웬 비누??'
나는 회사 브랜드와 전혀 매치되지 않는 상품에 의아함을 느꼈으나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나보다. 이미 매출을 위해서 이것저것 팔아온 사장과 그런 사장을 오래 지켜본 A씨는 거리낌 없이 비누를 집어들고 냄새를 맡았다. 그 후 부장의 주도하에 판매할 제품의 크기, 금액 등의 이야기가 오갔는데 나는 할 말이 없어 듣기만 했다. 그런데 A씨는 평소 사용하는 비누의 향이나 구매하는 최대의 금액 등 다양한 말을 꺼내는 것을 보고 ‘나는 생각 없이 살고 있구나.’를 느꼈다. 어쨌든 오래 토론할 만한 일은 아니어서 짧게 이야기를 마친 후 각자 집에서 사용해 보기로 하고 샘플을 나눠 가져갔다.
다음날. 사무실에 모두가 모였고 자연스럽게 비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어제 씻으면서 사용해봤는데 향이 좋더라고요. 그런데 거품이 잘 나지 않아서…”
“나도 사용해보니까…”
다들 한마디씩 했을 때 나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나는 어제 가져간 비누를 사용해보기는 커녕 가방에서 꺼내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나에게 질문이 돌아오지 않고 남은 사람들끼리 이야기가 잘 이어졌으나 나는 사실 적잖이 민망함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비해 나는 그러지 못했으니까. 이에 대해 주목받지 않았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두 번째는 입사 후 몇 주가 지났을 때 일어난 일이다. 물건 재배치, 판매 등을 바로바로 할 수 있는 오프라인과 달리, 온라인은 작업 시간도 오래 걸리고 완성되기 전까지 진행 상황을 알 수 없는지라 사장은 내 업무를 답답하게 여겼다. 그런데 엎친 데 겹친 격으로 내 성향 또한 수동적이라 시키는 일만 했지 직접 나서서 일을 하지 않아 결국 사장이 A씨에게 나에 대해 답답함을 몇 번 토로했다. 전화나 대화로 이 이야기를 여러 번 이야기를 들은 A씨는 점차 인내심에 한계가 오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상황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터라 이전과 비슷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근무시간에 전화로 사장이 A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또다시 나에 대한 불만을 얘기했던지 답하는 A씨의 목소리가 싸늘해져 갔고, 나는 이상한 분위기에 곁눈질로 A씨의 눈치를 봤다. A씨는 통화를 마치고 화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너 지금 뭐 하고 있냐?”
그 말을 듣는 순간 뜨끔했다. 사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루 전에 다 마쳤고, 바로 다음 일을 구상하기보단 사무업무 쪽에서 해야 할 일이 없는지 계속 살펴보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있는 그대로 얘기했고 A씨는 엄청 화를 내었다.
“네 할 일이 뭐야? 네가 여기서 해야 하는 일은 온라인 구축하는 일이잖아. 근데 그게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야? 아니잖아. 그럼 움직여야지. 그게 싫으면 가져다 달라고 얘길 하던가. 그런데 지금 회사에서 바라는 건 네가 직접 움직여서 일하는 거잖아. 그럼 그런 행동들을 어느 정도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
200% 맞는 말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상태로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반응도 시원치 않았는지 A씨는 답답해하며 내 스케쥴을 짜주고는 나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 최근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털어놓았다.
“저도 A씨처럼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이고 싶은데, 몸이 그렇게 따라주지 않아요.”
이 말에 A씨는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사람 성향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아. 네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렇게 살아왔는데, 바뀌고 싶다고 한 번에 바뀌겠어? 있는 그대로의 널 받아들여. 그게 너야.”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더 시무룩해진 내 표정을 보자 A씨가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너는 꼼꼼하고 깊게 생각한다는 장점이 있잖아. 그걸 살릴 수 있는 직종을 찾아봐. 오히려 나는 그런 능력이 필요한데 없어서 힘들어하고 있어.”
그 말에 능동적 성향의 지금의 일이 아닌, A씨의 일 같이 반복적이고 수동적인 성향의 일을 직접 해보는 상상을 잠깐 해봤지만 역시나 전혀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얘기해서 이런 일이 있기 전까지 내 성격과 성향에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 또한 무덤덤하고 낙관적인 내 성격을 부러워하던 터라, 내가 잘못되었거나 이상하다는 생각을 전혀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A씨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래. 내가 빠릿빠릿하고 능동적인 사람으로 바뀔 수 있었다면, 나는 이미 그런 사람이었겠지.’
그리고 평소 A씨가 주변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나도 똑같이 그렇게 주변에 관심 갖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가 좋았고, 편했다. 나에게도 충분한 장점이 있고, 그런 것들을 내가 알고 있었던 편이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 이후엔 한 번도 내 성격을 고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대신 어렴풋이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런 걸 못하니까, 차라리 내가 못하는 걸 장점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하고 함께 시너지를 내는 게 낫지.’
이후로도 삐걱삐걱하는 상황이 발생했지만 나를 위해 A씨가 조금 더 움직여주고, 나는 한발 앞서 행동하는 형식으로 어찌어찌 굴러갔다. 사실 시간이 약이 된 게 아닌, 매일 다양한 사건사고로 부딪치는 상황 속에서 서로서로가 약간씩 익숙해지고 물들어간 덕이었다.
그동안 A씨와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다. ‘어떠한 일이 벌어졌을 때 누군가의 100% 잘못은 없다. 기본적으로 50대 50의 잘못이다.’라거나 ‘타인의 행동이나 말에 숨은 의도를 파악하는 법.’, ‘맞는 타이밍에 이야기를 꺼내는 법.’,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이 주도권을 갖는 길이다.’, ‘기선 제압을 위해서라도 옷을 잘 입는 것도 중요하다.’ 등의 이야기를 듣고 실제 적용하는 과정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 외 회사에서 일어난 여러 상황이나 사람 관계 등을 예민하게 파악하고, 그것이 발생한 절차와 그 과정에서 들었던 생각이나 감정들을 세세하게 설명해주는 등 유용한 정보들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솔직히 지인을 통해 들어온 회사라 ‘굳이 그래야 하나?’ 같은 긴장감 없는 생각을 했다.
아예 새롭게 배운 것도 있었다. A씨는 갈등 상황같이 무언가 진지하게 얘기해야 하는 게 있다면,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말할 내용을 정리하고 상대방과의 대화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등 어떻게 말할지 이야기의 흐름들을 정리한다고 했는데, 나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이라 신기했다. 이것도 각 잡고 생각하는 게 아닌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라고 해서 정말 나와는 다른 사람이구나 싶었다.
나는 여태 살면서 갈등 상황이 손에 꼽았고, 그런 상황이 장기적으로 이어가기도 전에 금방 해결되어서 고민 자체를 깊게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사고방식은 그 자체로 새롭고 놀라울 뿐이었다. 아마 둔감하게 타고난 성격도 있겠지만, 깊게 생각하기 귀찮고 갈등을 싫어하니까 무의식중에 넘겼던 듯싶다. 하지만 결국 속으로 계속 쌓여서 터진 적이 몇 번 있었기에 그런 이상적인 해결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무척이나 신선했다.
그리고 그런 걸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나의 말에 A씨 또한 내가 생각 이상으로 별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어 조금 더 도와주는 계기가 되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