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능동적 이기적 인간

by 서다비

성수기가 시작됐다. A씨와 나는 처음 겪는 일이라 어버버 하면서도 그럭저럭 헤쳐나갔지만 부장은 그렇지 못했다. 매장에서 요청하는 물량이 평소보다 몇배는 늘어났고, 이것을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터라 힘들어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해야 할 일도 많은데 마음대로 착착 진행되지 않자 부장은 툭하면 짜증 냈다. 이를 보다 못한 사장이 아들을 불러 일을 돕게 했다. 그러나 사장 아들도 개인 일이 많은 터라 부장이 원하는 대로 스케줄 조정이 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다 결국 성수기 직후 퇴사를 했다. 이후 아들이 부장이 되어 기존 부장이 하던 일을 이어서 했다.


새로운 부장은 개인사업과 더불어 방송 쪽에서 프리랜서로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방송 일을 오래 일한 터라,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눈치는 물론이고 행동도 빨라졌던 듯싶다. 부장은 개인 사업 병행 및 교통상황에 구애받지 않기 위해 새벽 5시부터 움직였고, 퇴근 후엔 집에서 육아까지 하는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었다. 혼자서 일하기 버거울 때면 지원을 불러 빨리 처리를 했고, 일주일 치의 일정이 머릿속에 다 짜여있기에 함부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완벽해 보이는 모습에 사장은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답답한 구석이 전혀 없는, 그야말로 사장이 좋아할 완벽한 능동형 인간이었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본받을만한 점이 확실히 있었다. 회사 일에 집중하기 위해 운영하던 개인 사업을 정리하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등 회사에 시간을 더 투자하여 연봉을 스스로 높였다. 그 외 점장 중 월권을 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부장은 사무직원을 모두 모아두고 이 점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언급이 된 점장은 사장의 총애를 받는지라 결과적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꾸준하게 어필을 하는 모습이 대단했다. 이처럼 겉으로 보기엔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이면의 문제로 A씨와 나는 조금씩 곪아가고 있었다.


부장은 매장에서 쓰지 않는 물건들을 싹 정리해 사무실로 가져온 후 퇴근해(사라져)버렸다. 그래서 A씨와 나는 남겨진 물건들을 바로 분류하고 처분해야 했는데, 각자 스타일이 달라 또 부딪치게 되었다.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일이 주어졌을 때 나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는 반면, A씨는 이건 이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딱 떠오르는 사람이었다. 각자 해야 할 일도 남아있었고 퇴근시간도 가까워지는 터라 물건을 빨리 정리해야 했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머뭇거리자 답답함을 느낀 A씨가 화를 냈다.


“뭐 하고 있어! 같은 것끼리 분류하고! 사진 찍고 단체방에 올려서 필요한 매장 요청하라고 말하고! 그다음 꺼 정리해야지!”


“아니…. 알았어요.”


합심하여 작업을 마치고나자 A씨가 화를 억누르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이런 거 보면 어떻게 해야 할 지 떠오르는 게 없어?"


"네…. 전혀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요."


이 말을 들은 A씨는 알겠다고 말하며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후엔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나에게 맡기기보단 컨트롤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 외에도 부장이 매장에 필요한 자료들을 가져가기 편리하도록 지점별로 서류를 정리했는데, 부장이 까먹었다는 이유로 누락한 적이 많아 결국 A씨와 내가 퇴근길에 서류들을 매장으로 직접 옮긴 적이 자주 있었다. 게다가 부장은 개인 일로 일찍 퇴근하거나 일하던 중간에 방송 일을 하러 간 적이 가끔 있었는데 사장의 총애 및 월급은 그대로 받아 A씨가 열받아했다.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지만 부장은 본인의 뜻이 확실하고, 그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직접 움직이고, 타이밍 맞게 이야기하는 등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사람을 처음 보아 얄밉기는 하지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주장이 강한 세 고래 사이에 낀 새우 입장이 되어 계속 이리저리 치이는 일이 많아지자 점차 자존감도 떨어지고 계속해서 우울해져 갔다. 사장은 주기적으로 A씨에게 나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고, 부장은 본인이 해야 할 일만 하고 쏙 빠져나갔다. A씨는 이 둘이 짜증 나지만 시키는 일을 해야 하니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났는데, 나까지 어벙해하자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모두에게 시달리며 주어진 일을 하기에도 급급해했다. 그 와중에 사장이 나를 앞에 두고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들들 볶자 가끔 출근길에 교통사고가 나 1~2주 만이라도 입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하루하루 버티고만 있었다.


생각과 감정은 집에서 키우는 식물과 비슷한 면이 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먼지가 쌓이고 점차 말라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가끔 햇볕도 쬐이고 말도 걸어주고 해야 생기를 찾는다. 하지만 이때의 나는 이 회사에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고통의 나날들이 끝이 나긴 할까 같은 우울한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감각을 차단하고 호두처럼 단단한 껍질 속에 나를 감춘 채 이러면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웅크리기만 했다.

이때 빛도 보고 영양제도 주면서 적극적으로 그 상황을 타개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래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주어진 일을 하는것만으로도 힘들었기에 제대로 된 목표나 방향성을 세우지 못하고 오로지 근무시간만 버텼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런 상태에선 무슨 말도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나기가 내릴 때는 아무리 큰 우산으로 막는다고 하더라도 온몸이 젖고 마는 법이니까. 그렇게 나는 하루하루 감정과 생각이 조금씩 깊은 바닥으로 잠겨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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