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걱정 없어요. 당신은 아무 염려 말아요. 당신은 어두운 밤에 이 주변을 무작정 걸어 다닌다 해도, 절대로 그 우물에 빠지진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당신과 이렇게 꼭 붙어 있는 한 나도 절대로 빠지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절대로."
"어떻게 그걸 알지?"
"난 알 수 있어요. 그냥 알아요"
그녀는 내 손을 꼭 쥔 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잠시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난 잘 알아요. 이유라든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느끼는 거예요. 말하자면 지금 이렇게 당신과 꼭 붙어 있으면 말예요, 난 전혀 무섭지 않아요. 어떤 나쁜 일이든 어두운 일이든, 나를 유혹하려 하질 않는 거예요."
"그럼 문제는 간단하군. 줄곧 이렇게 하고만 있으면 그만일 테니까."
"그거-진심이에요?"
"물론 진심이지"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두 손을 내 어깨 위에 얹은 채,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 속에서는 묵직한 액체가 이상한 모양의 소용돌이를 그려내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발돋움하더니 내 볼에다 살며시 볼을 대었다. 그것은 한순간 가슴이 막혀 버릴 만큼 뜨겁고 멋진 동작이었다.
"고마워요."
"천만에."
"그렇게 말해 줘서 정말 기쁘지 뭐예요, 정말" 하고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어째서?"
"그건 안 될 일이니까요. 잔혹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말을 하다가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그대로 걷기만 했다. 갖가지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안 나는, 역시 말없이 그녀의 곁에서 묵묵히 걷기만 했다.
한참 뒤에야 그녀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건...... 올바른 일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당신에게도, 또 내게도"
"왜 올바르지 못한 일이지?" 하고 나는 조용히 물었다.
"글쎄요...... 누가 누군가를 영원히 지킨다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안 그래요? 가령 내가 당신과 결혼을 했다고 쳐요. 그럼 당신은 회사에 다니겠지요. 그럼 당신이 회사에 있는 동안엔 도대체 누가 나를 보호하고 지켜 줄까요? 당신이 출장을 가 있는 동안엔 또 누가 나를 지켜 주지요? 그러니 나는 죽을 때까지 당신과 붙어 다녀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그런 것은 좋지 못해요. 그런 것은 인간관계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그리고 언젠가 당신은 내게 싫증을 느끼고 말 거예요. '내 인생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여자를 돌보는 일뿐이란 말인가' 하고. 난 그런 건 싫어요. 그래서는 내가 안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까."
"그런 일이 일생 동안 계속되는 건 아냐. 언젠가는 끝나. 그것이 끝나는 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거야.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그때는 어쩌면 나오코가 나를 도와주게 될지도 모르지. 우리는 손익 계산표에 맞추어 살고 있는 건 아냐. 만약 나오코가 지금 당장 나를 필요로 하면 나를 쓰면 되는 거야. 안 그래? 어째서 그런 식으로 모든 일을 어렵게 생각하지? 어깨의 힘을 좀 빼라구.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으니까 그런 눈으로 사물을 보게 되는 거야. 어깨에서 힘을 좀 빼면 몸이 가볍게 돼."
<무라카미 하루키 - 상실의 시대 中>
근래의 회사는 참 조용하다.
큰 프로젝트가 지나가고, 이제 더 이상 특별히 할 것이 없어져 파이프라인이나 갈고닦고 하는 한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런 김에, 몰래몰래 숨어서 전자책으로 다시 독서를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책은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별 이유는 없고, 그냥 다시 읽고 싶어서.
언젠간 내게도 이런 일이 있었다.
지금의 순간을 사랑하면서도, 불안을 도무지 놓지를 못하는 나오코를 매일 같이 안심시켜야 하는 와타나베가 되어보는 그런 일.
썩 즐겁고 행복한 기억은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래도 어째서인지 문득문득 그날들이 생각이 나곤 한다.
별 이유가 없는 게 아니었나 보다. 내가 상실의 시대가 다시 읽고 싶어진 것은.
뭐가 되었건 곁에 있겠다던 그때의 약속들은, 끝나는 데에서 다시금 생각해 보자던 그날의 말들은, 이미 듬성듬성해진 와타나베의 기억만큼이나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지만, 이렇게 영문도 모를 날, 영문도 모를 시에 불쑥 떠올라 나를 생각에 잠기게 만들곤 한다.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속으로 열댓 번은 더 호언장담을 해댔지만, 결국에 나는 또다시 또 다른 나오코를 기다리고 있다. 와타나베가 숨 쉬는 공기만큼이나 신경 쓰지 않던 그 10월에 초목에서.
그 또 다른 나오코에게 해줄 것이라고는, 그저 꼭 끌어안아 어깨의 힘을 빼주는 것, 우물에 빠지지 않도록 두 손 꼭 맞잡아주는 것 말고는 하나 없지만, 늘 그래왔듯, 끝나는 데에서 다시 생각해 보면 될 일이니까.
바야흐로 상실의 시대인가 보다.
얼굴도, 이름도 모를 누군가를 이리도 즐거이 기다리는 것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