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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녀는 대화가 하고 싶다

책 읽고 하는 대화(가 필요하다)

by 아피

얼렁뚱땅 독서토론이었다. 지금 쓰는 글의 원래 제목 말이다. 신정에 친구들을 만났는데 우리 책 좀 읽자는 취지에서 각자 책 한 권씩 읽어오고 이야기하기로 약속을 잡았었다. 친구들 맞으려고 청소까지 다 해두고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고 있었는데 약속시간 30분 전에 갑자기 약속이 깨졌다. 한 명이 아프다고 쉬어야겠다고 하니 다른 한 명도 아프다고 하고 두 명이나 못 오는데 나머지 둘이서 뭐 하나 싶어서 자연스럽게 그날 약속이 취소 됐다. 약속이 끝나면 그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쓰려고 제목까지 미리 정해놨는데 쓸모가 없어졌다.


나는 혼자 하는 독서만 하는지라 책 읽고 하는 대화가 너무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만난 친구들이 독서모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니 신나서 이것저것 준비했다. 책도 읽고 책 내용도 정리하고 질문도 뽑아두고 혹시 내가 잘못 전달하는 부분이 생길까 봐 한번 더 훑어보기도 했다. 그다지 맹신하지는 않지만 나름 mbti J수치가 높게 나오는 지라 계획적, 체계적인 것을 좋아하는 나는 내일 독서모임을 어떻게 진행할지 진행계획도 전날 생각해 두었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약속시간 30분 전에 취소되다니.. 좀 마음이 가라앉았다. 되게 들떠있었는데 좀 초연해졌다.


책 읽고 어떤 대화를 나누던지 간에 나는 책 읽고 하는 대화를 꽤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다. 어쩌면 독서본능이 깨어난 그 순간부터 나는 대화가 하고 싶었다.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흥미 있어한 주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대화하는 건 즐겁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내 주변에는 책 읽는 사람이 많이 없다. 그리고 친구도 많이 없다. 만나기로 했던 친구들은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지만 고등학생 이후로는 시간이 맞지 않아 시간 맞추기 쉬지 않다. 엄마가 책을 좀 읽으시기는 하는데 내가 딱히 엄마랑 책 읽고 대화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기분이 그렇다. 그래서 내가 독후감을 쓰나 보다.


하여간에 그래서 나는 책 읽고 대화할 상대가 잘 없다 보니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말을 막 토해내는 편이다. 그래서 그 대상은 주로 내 지도교수님이 된다. 내 말을 잘 들어주시고 반응도 잘해주시는 분인데 내가 너무 신나서 떠드는 바람에 2학기에 내 평균 상담시간은 거의 한 시간이었다. 그중에서도 책 읽는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이 책은 이래서 흥미롭고 저 책에서는 저런 점을 내가 처음 알게 되었고 시는 어떻게 읽는지 묻는 대화를 한다.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막 토해내고 나면 나에게 유익한 대답이 돌아오고 상담이 끝나고 나면 기분이 좋아져서 교수 연구실을 나서게 된다.


저렇게 상담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나면 잠깐은 괜찮지만 시간은 흐르고 나에게는 또 다른 사건과 독서가 쌓이기 때문에 대화할 상대는 계속 필요하다. 트레바리를 해보라는 추천도 받았는데 4달에 35만 원이나 내고 나갈 가치가 있는가 싶기도 하고 나는 자율적인 독서를 추구하기 때문에 나의 추구미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주말에 기숙사에서 돌아오는 나의 혈육을 붙잡아두고 이 책에서 이런 내용이 있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저 이론이 참 흥미롭지 않느냐 하고 주절주절 떠드는 거다. 모든 열정을 다해 들어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 잘 대답해 준다. 한 번은 국화와 칼이라는 책을 읽고 사실 일본인들은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더라 그들은 오직 현세를 위해 참배한다더라 신기하지 않으냐, 일본인들은 생의 자율성 주기가 우상향 그래프가 아니라 U모양 이라더라 흥미롭지 않느냐 이런 얘기를 하느라 정신을 쏙 빼놨고(과학도라 이런 얘기는 좀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다.) 릿터 50호에 나온 사랑 접인 병원의 소재를 가지고 손가락을 나누는 시술이 있으면 할 거냐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할 거냐 이런 식으로 시작한 질문으로 너무 진지하지 않은 정도로 대화를 한다. 대화가 끝나면 내 얘기를 들어준 대가로 나도 언니가 하는 얘기를 비슷한 정도의 성의로 들어준다. 쌤쌤인 셈이다.


브런치를 시작하게 된 데에는 대화를 하고 싶었던 이유도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좀 들어보라고 쓰는 거 기도 하다. 물론 브런치는 내가 모르는 불특정 다수가 볼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한번 손으로 쓴 글에서 일종을 검열을 거쳐 인터넷 세상에 올라가는 글이지만 그래도 내가 책 읽고 주절거리는 말들을 들어주고 반응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좋기도 하다. 그렇지만 현실 사람과의 대화에 대한 열망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주고받을 수 없는 생생한 대화와 토론이 하고 싶다. 문학소녀는 대화가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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