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그토록 사랑하게 하는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만나기 어려운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해 본 적이 있으시냐고 묻고 싶다. 아이돌이나 배우 같은 사람들 말이다. 물론 나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걸그룹 에스파와 배우 두 명을 특히 좋아한다. 바이올리니스트와 피아니스트도 좋아한다. 하지만 난 그들을 좋아하기만 할 뿐 그다지 뜨거운 온도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들과 만나고 소통하기 위해 굳이 집 밖을 나서지도 않고 큰돈을 쓰지도 않는다. 콘서트, 팬사인회, 팬미팅은 갈 수 있다면 가겠지만 굳이 거금을 들여 가고 싶지는 않다. 집에서 유튜브로 보면 되는걸? 관객과의 만남? 치열한 경쟁을 뚫기 귀찮고 정보를 찾아보기도 귀찮다. 되려 가끔은 팬을 만나고 싶으면 날 직접 찾아와 주면 안 되나? 그럼 만날 의지가 생길 텐데...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이돌 팬들이 흔히 하는 대화 구독 서비스도 하지 않고 sns라이브 방송도 보지 않는다. 애초에 트위터 외의 sns는 잘 안 하기도 한다. 그런 나에게 열혈 팬들은 참 신기한 존재다. 사랑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영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사랑하고 열정과 에너지를 주는지 궁금할 뿐이다.
책 사랑 파먹기에는 다양한 단편이 실려 있지만 나는 아이돌에 대한 내용을 담았던 두 단편인 '여분의 해마'와 '사랑 파먹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평소에 아이돌 꽤나 좋아한다는 애들은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아이돌 문화에 대해서도 엿듣고 다닐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트위터(현재는 X로 바뀌었지만 대체로 트위터라고 부른다) 문화와 언어, 포카(포토카드) 거래라던가 굿즈 양도, 생일카페 이런 것들에 대한 고증과 묘사가 너무 사실적이었고 그 안에서 주인공들이 느끼는 감정들은 내가 의문하고 있던 지점들과 일부 맞닿아 있어서 인상 깊었던 것 같다.
여분의 해마 에피소드에서는 아이돌 멤버 해마의 포토카드를 비싸게라도 사서 모으려는 주인공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다 포토카드 속 해마가 현실에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현실의 해마와 핸드폰 혹은 어떠한 매체를 통해 보는 해마를 다르게 대하는 모습이 나온다. 현실의 해마를 부양하기 위해 쓰는 돈은 아깝고 포토카드에는 17만 원의 거금을 들일 수 있는 모습에서 나는 과연 우리가 사랑하는 모습이 무엇 일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연예인을 사랑하지만 그들의 외형과 만들어진 모습을 소비할 뿐이지 그들의 실상을 알지 못한 채로 사랑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형태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 파먹기 에피소드는 세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모두 마지막에는 실사 아이돌이 아닌 가상의 아이돌을 좋아하게 되면서 끝이 난다. 이 에피소드에서 세나라는 인물이 가장 먼저 가상의 아이돌을 좋아하는데 사고 칠 걱정이 없고 프로그램으로 채팅하면서 즉각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인다. 최근에는 버추얼 아이돌이 많아졌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꽤 있어서 괴리감을 느낀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저런 대상에 대한 사랑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건지 너무 알고 싶었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에서 내가 놀랐던 부분은 아이돌 팬들이 주로 활동하는 SNS인 트위터(X)에 대한 고증이 너무 잘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돌 팬들이 하는 말투, 어휘 이런 것들을 마치 당사자처럼 써 내려갔다. 읽는 순간 책이 아닌 인터넷을 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아이돌을 좋아하는 세대가 소설가가 됐고 그런 사랑을 써내려 가는 시점이 왔다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외에도 띠부띠부 랜덤 슬라이드, 다음 챕터 에피소드도 인상 깊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모인 주인공들은 지친 태도를 보여준다. 그런데도 이런 모습에서 맥 빠지는 게 아니라 되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너 나이에 뭐가 힘드냐고 공격받을 수 있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젊은 세대도 힘들다... 쉬고 싶고 누워있고 싶고 노력 안 하고 돈 벌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나가서 알바라도 하라고 엄마에게 한 소리 듣는 나도 이번에는 쉬어야겠다며 집에서 칩거 중이지만 그렇다고 매일 즐겁지도 않고 오히려 불안함을 느낄 때도 많다. 작가가 나와 비슷한 세대이기에 이런 비슷한 마음과 감정들을 잘 녹여낸 것 같다.
실제로 띠부띠부 랜덤 슬라이드 에피소드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최근 들어 나는 씻고 밥 먹고 청소하고 외출할 때 에만 잠깐씩 직립보행을 하고 그 밖의 상황들 속에서 느 거의 누워서 생활한다" 또 이 주인공은 한 달 180만 원의 실업급여를 계속 받으려고 취업 교육은 받지만 취직하려는 의사는 없다. 일복이 있다는 말에 화를 내기도 한다. 또 두 번째 에피소드인 당신이 기대하는 건 여기에 없다 에피소드에서도 주인공은 계단에 갇혀 있다가도 물이 올라오자 조금 더 눕는 편을 택하며 물살에 자기의 몸을 맡긴다. 이런 식으로 삶의 의지에 대해서 초연해진 모습들이 슬프기도 하면서 공감도 가면서 되려 읽기 편안한 주인공을 만들어 줬다.
애초에 열렬한 연애소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읽고 나서 공허해지는 소설집인 건 몰랐다. 다 읽고 나면 회의주의자가 될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초연해진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꼭 사람이 아니고 무엇 이더라도 사랑하는 건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책의 표지에는 한 작가의 평이 담겨 있는데 거기엔 이렇게 쓰여있다. "이 소설의 제목은 '사랑 파먹기'인데, 떠올리면 손가락으로 자기 심장을 찌꺼기까지 긁어먹는 모습이 떠오른다. (후략)" 정말 적절한 평인 듯하다. 최근에 이 책을 비롯한 한국 문학을 읽으면서 한국 문학과 젊은 작가 작품이 이렇게 좋은데 안 읽어보면 손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그중에서도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은 이 책을 읽어보라고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