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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녀의 귀환

내 안의 독서 본능이 깨어나다

by 아피

'애늙은이'였다. 어른들이 나한테 붙여준 별명. 특히나 같은 교회에 다니던 집사님께서 나를 애늙은이라고 자주 부르셨다. 다른 애들이 만화보고 놀이터 가서 뛰어놀 시간에 나는 책을 한편 더 읽기를 택하는 모습을 보고 그런 별명을 붙여 주셨다. 실제로 교회 유치부에 다니던 때에 나는 누구랑 놀았던 기억보다는 책 읽고 놀았던 기억이 더 많기도 하다. 어린이 문학 전집, 만화로 고전 읽기, WHY책 등등 수많은 책을 읽었다.


초등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는 매일 아침마다 10분 독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참으로 성실하게 매일 아침마다 10분씩 책을 봤다. 쉬는 시간에도 책을 자주 읽었던 것 같다. 가방이 무거워서 키 작아진다는 엄마의 잔소리에도 나는 책을 가방에서 빼지 않았다. 6학년이 됐을 때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책을 들고 다녔다. 매주 새로운 책을 한 권씩 읽고 독서토론 하는 논술 학원도 다녔는데 그것도 책을 읽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나는 그렇게 중학교 3학년 때까지는 책을 읽었다. 비록 저 시기에 책태기가 와서 중학교 때는 책을 건성으로 읽었던 것 같긴 한데 이러니 저러니 해도 책은 참 열심히 읽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많은 게 달라졌다.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바로 교육열과 입시의 나라다. 즐겁게 책 읽을 시간 따위는 없다. 특히나 입시에 미쳐있는 학교를 다니면서 여가시간에 독서하기 같은 건 완전히 사치가 되었다. 책을 읽는 것은 오직 수행평가를 위해서 일뿐... 한번 책을 안 읽기 시작하니 책 읽는 즐거움이라던가 태도 같은 게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마른오징어를 질겅질겅 씹는듯한 태도로 책을 읽었다. 질겅질겅.. 턱관절이 뻐근해지는 느낌처럼 머리통이 뻐근해졌다.


이런 나에게 한 번은 충격적인 일이 생겼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기말고사 이후. 학교에 왜 나가는지 의미는 알 수 없는 시기. 공부도 안 하고 놀기만 하는 애들을 묶어놓고 이삼주 정도 이런저런 일들을 하는 그 시기에 우리 반은 단체 상담이라는 걸 했다. 쉽게 말해 담임선생님 한 명과 애들 8명 정도가 한 번에 들어가서 어두운 데서 불 하나 켜두고 이야기하는 그런 시간이었다. 서로의 인상이나 1년 동안 지낸 소감을 이야기하는데 담임선생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OO(나)는 참 문학소녀 같더라~ 감수성도 풍부하고 마음도 여리고~. 솔직한 소감은 "나를 1년 동안 본 담임선생님 맞아? 문학은 손에도 안 댔는데?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는 거 아니야?"였다.


확실히 그 시절의 나는 자발적으로 읽은 책이 한 권도 없었다. (생기부에 쓰고 싶어서 읽은 자발적 독서는 절대로 자발이 아니다....) 책을 읽어도 사회, 인문학 책을 읽었지 문학은 일절 읽은 적이 없다. 이건 고등학교 내내 그랬다. 무언가 하느라 아Q정전과 레미제라블을 읽은 적은 있는데 그것도 수행평가를 위한 목적으로 읽은 거니 순수한 의도로 읽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나에게 문학소녀라니.. 기분이 묘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금방 겨울방학을 했고 나는 그렇게 남은 2년을 더 책을 읽지 않고 졸업을 했다.


대학은 어떠한가... 1학기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책 안 읽는 삶.. 아 재미없어... 다른 애들이랑 말 걸기 싫어... 할 일 없던 겨울방학 때 산 책이 두권 있었고 나는 그 책을 읽기로 했다. 마침 책을 읽고 와서 독후감을 알려주면 1점을 추가점으로 주겠다는 교수님의 말에 책을 읽었다. 나는 양귀자 작가의 '모순'을 읽었는데 다 읽어가던 즈음에 '라틴어 수업'을 읽고 와야 추가점을 준다는 말을 듣고 김이 팍 식었다. 그래서 그냥 마음속에 담아두고 다음 책을 읽었다. 두 번째 책인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었는데 무언가 올랑 말랑 한 느낌이 오고 멈췄다. 독서를 3년을 쉬니 뇌가 독서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 멈춘 기계를 3년 만에 다시 굴린 거다.


방학이 오고 나는 책을 읽지 않았다. 그러다가 2학기 시작하기 얼마 전에 다시 책을 읽었다. 그때 읽은 책은 재미가 없었다. 그리고 새 학기가 왔고 새 학기는 정말 할 일이 없었다. 공강이 우주처럼 나버린 어느 날 나는 도서관 신간 대출실에 가서 책을 읽기로 했다. 그때부터 책을 열심히 읽은 것 같다. 처음에는 지식책을 위주로 읽었다. 문화인류학, 심리학 이런 책 그러다가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 터졌다. '한강 작가 노벨상 수상' 교수님은 우리에게 문학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그렇게 교수님이 추천해 주신 릿터를 읽어 보았고 그때부터 나는 다시 문학을 읽기 시작했다. 단편소설부터 천천히 장편으로 넘어가기, 시를 읽기 어려우니 필사하기, 책 읽고 독후감 쓰기. 나는 문학소녀로 다시 거듭나는 단계에 있다. 집 나간 그 문학소녀가 귀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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