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다
매일 8 천보씩 걷는다. 더 걷거나 좀 덜 걸을 때도 있지만 평균적으로 8천을 지키고 있다. 8천 걸음을 걸을 때마다 100원의 리워드를 주는 앱테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에 안 가거나 나갈 일이 없는 날에도 굳이 굳이 밖에 나가서 조금씩 걷다가 온다. 알라딘 중고서점은 걸어서 다녀올 수 있는 거리이면서 걸음수를 채우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그냥 구경만 할 생각이었는데 '보건교사 안은영'이라고 쓰여 있는 책을 발견하자마자 집어 들었다. 머릿속에서 '이건 사야 돼!' 하고 소리쳤다.
사실 보건교사 안은영이라는 이야기는 넷플릭스 드라마 런칭 소식 때 처음 접했다. 처음 나왔을 때 드라마를 보고 싶었는데 시작하길 주저하는 성격이라 그때 보지 못했다. 드라마를 먼저 다 본 언니가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안 간다고 했고 책을 읽으면 이해가 더 잘 될 것 같다는 후기를 봤다. 흠.. 괜히 또 주저하게 됐다. 그렇게 계속 안 봤다. 2020년에 나온 드라마를 여태까지 안 보다가 책을 발견한 순간 '책도 읽고 드라마도 봐야지'라는 마음이 생겼다. 리뉴얼돼서 알록달록 해진 겉표지가 찢어져 버린 중고책을 집으로 모셔왔다.
영화 보는 거랑 비슷하게 책도 3주가량 모셔두고 나서 날을 정해 시작했다. 한번 펼치니 책이 술술 읽혔다. 드라마 예고편은 본 적 있어서 그런지 안은영과 홍인표의 목소리가 배우들의 목소리로 들리는 신기한 현상도 겪었다. 안은영 캐릭터가 참 마음에 들었다. 열심히 희생하면서도 욕은 욕대로 다 하는 성격이 참으로 통쾌하니 보기 좋았다. 장편소설이지만 에피소드로 나뉘어 있어서 끊어 읽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문장도 쉽게 쉽게 읽히니 하루에 하나씩 이런 식으로 읽기도 좋았다.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았던 에피소드는 '레이디버그 레이디'였다. 래디의 엄마가 본 귀신이 진짜로 존재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 마음을 위로해 주려고 일종의 쇼를 한 안은영의 마음과 그 과정이 보기 좋았고 재미있었다. 진짜 퇴마를 하는 게 아니라서 저런 식으로도 전개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했다. 정작 드라마에서는 이 에피소드가 제대로 실리지 않아서 6부작 짜리 드라마를 보는데 아쉬웠다. 래디 캐릭터도 참 좋았는데...
'온건교사 박대흥' 에피소드에서는 참 기억에 남는 문구가 있었다. 학생들이 역사교사인 박대흥에게 질문한 내용들인데 '왜 나쁜 사람이 선거에서 뽑히나요? 왜 좋은 방향으로 일어났던 변화들이 무산되나요? 왜 역사는 역류 없이 흐르지 못하나요?'이런 질문들이었다. 이렇게 시의적절할 수가....! 모든 시대의 사회적 상황에서 공통되는 것일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참 인상 깊었다. 작가들의 통찰력은 참 대단한 것 같다. 이런 별거 아닌 것 부분에 나는 가끔 꽂힌다.
책을 절반정도 읽었을 때 드라마를 시작했다. 한번 보기로 마음먹는 게 어렵지 보는 건 금방 볼 수 있다. 확실히 왜 이해가 안 간다고 하는지 책을 보고 보니까 알 수 있었다. 설명이 좀 불친절한 경향이 있다. 그래도 드라마 안에서 나오는 캐릭터들이 책에 나온 묘사랑 다 비슷한 정도로 구현되어 있어서 놀랐다. 성별이 바뀌고 이런 건 있었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매우 비슷한 정도로 나와서 책이랑 같이 읽는 재미가 있었다.
책을 읽는 거, 드라마를 시작하는 거 둘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책을 시작하는 게 좀 더 부담이 없다. 마음먹기의 무게감이 다르달까? 책은 오프라인에서도 볼 수 있고 들고 다닐 수 있고 한 시간씩 자리를 붙들고 있지 않아도 볼 수 있다. 드라마는 온라인 상황이나 스트리밍 기기를 들고 다녀야 하고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렇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책도 드라마도 시작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둘 다 완주했다. 옛날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 시작이 반이다. 잊고 있다가 이런 때 문뜩 깨닫는다. 책 완주, 4년간 묵혀둔 드라마 완주, 깨달음까지 얻었다. 책 한 권 읽은 것뿐인데... 1석 3조랄까? 빨리 다음 책을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