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오한 일이다

by 굴러가유

1.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럴을 꼽자면 Kelly clarkson의 underneath the tree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이제 취향이란 게 생긴 것이다. 기분이 좋다. 매년 크리스마스 기간이 되면 이 노래만 수없이 반복 재생해도 질리지 않는다. 오늘부터 시작이다.


2. 쉽게 생각했다. 내가 이 일을 하고 싶다고 마음먹었을 때가 이젠 흐릿해지고 있어서 그런지, 이 길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걸 점점 망각하고 있는듯하다. 이게 그렇게 잘 풀릴 일이었으면 n 년 무명 배우라는 말은 왜 있을 것이며, 배우 '지망생'이라는 단어는 왜 생겼을까. 기대한 만큼 되지 않으니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더 이상 삽질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하는 만큼 바로바로 성과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더 빠른 보상과 더 급격한 성장을 나도 모르게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 바라는 수준이 아니라 당연시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마치 세탁소에 맡긴 내 세탁물을 찾으러 가는 것처럼. (실제로는 맡긴 적도 없는데 말이다.)


3. '각오한 일이잖아.' 그러게. 각오한 일이었는데. 내가 그 '각오'라는 것을 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부끄러움 없이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다면 충분히 억울하라고 하겠다만 이건 뭐 그렇지도 못할 거라, 그냥 부끄러울 뿐이다. 나의 정신적 + 체력적 나약함, 스스로에 대한 확신 부족 뭐 그런 것들로 흔들리는 마음이다. 아니, 사실 그런 것보다 남들과의 비교인 것도 한몫하겠지.


4. 내 유튜브 알고리즘은 무한도전 같은 예능, 자기 계발 관련 콘텐츠, 그리고 가사 없는 노래가 거의 전부다. 예능은 평소 외출 준비를 할 때 정적을 채워줄 팟캐스트 같은 역할이다. 솔직히 스마트폰 멀리하고 싶은데, 정적 속에 찾아오는 무력감과 더불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수만 가지 고민 걱정거리가 버겁다. 자기 계발 콘텐츠는 나를 붙잡는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배우가 가져야 하는 태도부터 수면습관, 재테크 관련 정보, 내면의 강함을 기르는 방법까지 섬네일 보고 당기는 걸 누른다. 그렇게 많은 것들을 보니 공통점들이 보인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지 마세요. 있는 그대로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세요.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을 하세요. 하하 알아요 알아 이제 나는 자기 계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수준까지 온건 아닐까 싶다. 정작 스스로는 바뀌지 못한 채.


5. 해보고 싶은 일이 배우만 있는 건 아니다. 책을 좋아하니 출판사나 관련 업계에서 일해보고 싶기도 하고 하다못해 북튜버와 함께 유튜브 일도 해보고 싶다. pd라는 일은 나의 꿈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도 우리 엄마가 밀고 있는 나의 꿈이기도 하다. 엄마는 나를 잘 안다. pd 하면 잘 할 거 같다는 얘기를 몇 년 전부터 지금까지도 해오고 있고, 솔직히 나도 안다. 나도 하면 재밌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배우 그만두고 pd일 시-작! 한다고 해서 그것도 뭐 순탄할까. 좀 여러모로 힘과 용기가 떨어진 시점이다. 나 이렇게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나?


6. 그렇다. 난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군. 난 두려움이 상당한 사람이다. 멘탈이 약하고 남들이 툭 던진 말에도 상처를 쉽게 받아서 나의 에너지를 100퍼센트 다 담아 요구하지도 않는다. 쿨하게 '아니면 말고' 와 같은 태도를 탑재해 상대가 덜 부담스럽게, 나도 덜 상처받게 초기 세팅을 한다. 쿨한 사람인척하는 게 웃기다. 근데 뭐 나 같은 사람들이 많겠지? 그로부터 또 위로를 받아본다.


7. 배우를 상당히 존경하게 된다. 물론 원래도 대단한 사람들이라 여겼지만 정말 직업을 '배우'라고 말하기까지 그들이 밟아온 길과 땀과 눈물들이 말도 안 되게 서글프고 뜨겁다는 걸 하루하루 체감하고 있기에 더욱 존경심이 깊어진다. 나도 그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혹은 나는 그들보다 더한 애정과 에너지로 존버 할 수 있을까. 사실 이런 의심과 걱정할 시간에 그저 하루하루 충실히 살면 된다는 그런 유튜브도 여러 개 봤는데.. 생각해 보니 나는 중학생 시절부터 '서울대 가는 법', 'ebs 공부의 왕도' 같은 책과 프로를 노트를 펴고 정리하며 정독했던 아이였다. 그걸 왜 '정독'을 하고 '정리'를 하고 있냔 말이다... 하... 진짜 세 살 버릇 여든 가나...? 그냥 좀 습득해라..


8. 삼성 갤럭시도 사달라고 그렇게 광고하는데, 나는 뭐라고 그렇게 홍보하는 걸 부끄러워하는가... 숨 막히는 인구 사이에 '이정'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야 하는데, 사력을 다하지 않고 뭐 하는가...


9. 오늘 지하 헬스장에서 안 하던 운동을 해보았다. 푸시업을 했는데 완전 지면은 아니고 45도 정도 되는 각도의 렉 기구에 기대어 10번씩 5세트로 푸시업을 했다..! 이건 어마어마한 이정의 업적인 게, 나는 상체에 정말 말도 안 되게 근력이 없다. 생존 근육뿐이라 내 몸무게를 나의 팔로 50번을 들어 올렸다는 건 (물론 45도이지만) 기록할 만하다.


10. 쓰다 보니 1시간 정도 지났고, 난 이제 자야 한다. 왜냐면 오전 알바를 그만두고 난 후로 자꾸 늦잠을 자려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백수는 게으르면 끝이다. 백수는 루틴이 없으면 망한다. 뇌 속에 강하게 새기고 다니는 문장이다. 완전한 백수는 아니지만,, 암튼 안된다. 이번에도 유튜브 어디 자기 계발 영상에서 본 건데, 사람은 엄-청 자고 엄-청 논다고 행복해지지 않는다 하더라. 최근에 내가 경험한 일이다. 정말 그렇다. 정말 기분 더럽다. 오히려 더 피곤한듯하기도 하고 암튼 죄책감이 말이 아니고 찝찝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 하루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그냥 한다. 충실히' 그렇게 사는 것밖에 답이 없는듯하다. 다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또 그렇게 다들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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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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