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학원에서 예비 고1을 대상으로 짧은 설명회가 있었다. 나도 강사진 중 한 명으로서 아이들 앞에서 몇 마디 던져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 어떻게든 피해보려 했으나 ㅡ'다른 수학선생님들이 더 좋은 말씀 해 주실 것 같아요' 했지만 원장님께서는 굳건하셨다.ㅡ 쉽지 않았다.
5분에서 10분 사이로 현 중3 내년 고1을 대상으로 수학선생으로서 어떤 말이든 해야 했지만 참 마땅치 않았다. 내 인생도 모르겠는데 예비 고1한테 내가 뭐라고 앞날의 경고와 지침을 내릴까.
고등학생 됐다고 분위기 휩쓸려 쓸데없이 공부 기분만 낼 거면 그럴 시간에 잠이나 더 자고, 밥 잘 먹고, 부모님한테 잘하라고나 말해주고 싶었다.ㅡ 정확히 반대로 살았던 이정의 학창 시절을 반영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했다간 원장님이 나를 밀어 넣은 보람이 없으실 것 같아서, 그냥 아이들에게 학원을 잘 써먹으라는 말만 해주고 나왔다. 진심이었다.
2. 이 5분에서 10분 되는 설명회라고 할 것도 없는 짧은 설명회 때문에 은근히 깊숙한 긴장과 스트레스가 어제부터 줄곧 이었다. 내 인생도 막연하면서 누군가에게 고작 몇 년 더 먼저 살았다는 이유로 이러해라 저러해라 조언을 놓는 게 참 낯부끄럽고 불편하다. 그래도 어찌어찌 하루를 끝내고 집에 들어가는 귀갓길이 후련하고 굉장히 설렌다. 얼른 집에 가서 <환승연애> 새로운 회차를 봐야 한다.
3. 남의 연애사 정말 일절 관심 없고 그걸 왜 좋다고 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도 막 그 정도는 아니다. 근데 나는 그걸 빌미로 우리 집 사람들이 약속한 듯 옹기종기 거실에 모여 앉아 누구도 정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그런 시간이 되어버린 가족 이벤트가 생긴 게 기쁠 뿐이다.
수요일 오후 6시에 스트리밍 되지만 그 누구도 먼저 보지 않고, 스포 당하지 않고, 스포 하지 않고, 티브이 화면 앞에 3인용 소파에 빽빽이 들어앉는다. 3명이 덮긴 빡빡한 보드라운 담요를 다리에 주르륵 덮고는 화면에 몰입해 출연진의 대사가 들리게끔 그 사이사이에 리액션을 곁들이며 그 몰입감을 더 끌어올린다. 애초에 혼자 볼 생각도 없고 혼자 볼 거였으면 애초에 보지도 않았을 프로그램이지만, 매주 우리가 티브이 앞에 모이게 되는 이유가 생긴 게 그저 행복하다.
4. <주토피아 2>를 보고 왔다. 나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만 동물은 솔직히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내 동년배들 중 동물애호가가 아닌 애들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지만 나는 '동물'보단 '인간' 파여서 그런 동물을 귀여워할 시간에 아기들을 사랑한다. 내 기억상 <주토피아 1>도 그렇게 인상 깊게 보진 않았던 것 같았는데 누구 때문에 어찌어찌 보러 간 <주토피아 2>는 정말... 사랑스러움의 결정체였다.
' 아 맞다, 이거 디즈니였지, ' 디즈니 영화라는 걸 먼저 상기시켜 줬다면 지금보다는 더 호의적으로 관람하겠다는 의사를 보였을 텐데. 찰나에도 수많은 디테일을 챙기는 디즈니의 세심함이 감동일 뿐이다.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워 정말..
5. 온 가족이 5km 마라톤을 다녀온 지 5일째다. 평소 아침마다 3km씩 아파트 지하 헬스장에서 뛰고는 있었지만 트레드밀에서 뛰는 건 진짜 재미가 없다. 매일 3km 뛰는 것도 하기 싫어서 30분씩 걸려 억지로 해오는 습관이다. 그런 내가 가족들과 함께 5km 마라톤이라.. 하지만 난 믿는 구석이 있다.
올해 3월, 10km를 1시간 9분에 뛴 경험에 비춰보았을 때, '마라톤 뽕'은 꽤 나한테 잘 먹혔다.
그래서 이번 가족행사도 그 빨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갔는데 33분을 찍었다. 오호 역시... 만족스럽다.
6. 부작용은 마라톤 대회 이후 매일 뛰는 3km 아침 트레드밀이 더더욱 하기 싫어졌다는 점이다.
목표치를 해내고 나니 잠시 시들해졌나 보다. 어제는 그런 이유로 건너뛰었고, 오늘마저 안 뛰면 기적처럼 잡아둔 러닝 습관이 말짱 도루묵이 될까 봐 눈 뜨자마자 드림렌즈도 안 빼고 옷부터 갈아입었다. 그리고 신기한 경험은 3km를 다 뛰었는데도 힘들지 않았다는 것.
진짜 홀리 몰리다,,, 나 이제 좀 강도를 높일 때가 된 걸까,, 성장했나,,
7. 최근 sns를 보다가 래퍼로 활동하다 연기자의 꿈을 도전한다는 한 연예인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100개의 오디션을 지원하고 3개 정도의 답이 왔다는 내용이 뇌리에 박혔다. 저렇게 유명한 사람도 100개를 넣어야 3개 정도 반응이 오는데, 나는 뭐라고 이렇게 안일하게 있으면서 신세한탄을 하고 있었나. 오디션을 지원하면서도 '이 배역이 나랑 잘 어울릴까' , '이 배역 지원에 이 프로필과 이 연기영상이 어필하는데 적절할까' , '이 영상은 지금 보니 참 마음에 안 드는데 그럼 새로 찍어서 보내야 하나. 근데 또 그렇게 새로 찍는다 해서 마음에 들까' 이것저것 아쉬운 고민들이 머리를 덮쳤지만 그 연예인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저 100개를 넣자는 목표로 무작정 넣었다. 물론 100개는 못 넣었지만...
8. 정말 완벽히 준비가 되어 도전하는 사람은 절대 없다는 말이 있다. 준비가 될 때까지 준비시키다간 그렇게 준비에서 끝나는 걸 알기에 그저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했다. 그리고 잠들기 전 지금, 여느 때처럼 sns와 이메일을 확인했는데 못 보던 이메일이 와있었다. 캐디 겸 연출가로 일하시는 분께서 내 유튜브 독백을 보고 연락을 주셨다고 했다. 상업적인 목표로 주신 연락일지 몰라도 이건 굉장히 긍정적인 신호였다. 어쨌든 나라는 사람이 연기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분께 닿았다는 말이니까.
9. 학원 설명회 스트레스와 더불어 날도 추워지고, 컨디션도 안 좋고, 연말이다 뭐다 하며 기분도 뒤숭숭해지면서 마음속이 복잡했는데, 그럼에도 남은 정신 줄 붙잡고 뭐라도 오디션하나 지원하고 이메일 돌린 게
그냥 삽질한 건 아니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되는구나, 뭐라도 하면 뭐라도 되겠구나.
10. 종종 이번 연도에 내가 했던 일들을 돌이켜본다. 연말이 되면 후회되고 아쉬웠던 점들이 몰려오기 마련인데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스스로 도전해 보았던 시기였던 것 같아서 은근 후련하고 뿌듯한 것 같다. 드럼과 요가를 배웠던 것, 마음먹고 다이어트를 하며 식단과 운동을 챙겨했던 것, 10킬로미터 마라톤을 생각보다 좋은 기록을 냈던 것, 덕분에 공복 러닝 습관을 만들 수 있었던 것, 여행 브이로그를 만들어 올렸고, 전기 바이크를 타고 울릉도 한 바퀴를 돌았고, 이제 누구한테 독서가 취미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으로 책에 흥미를 올린 것 등등.. 뭐라도 했더니 정말 뭐라도 되었구나. 뭐라도 하는 게 이제 기대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