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색 연필

by 굴러가유

K는 계속 마음에 쓰였던 숙제를 해치우기로 마음먹는다.

밤 12시 14분.

지금 자면 내일 아침은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을 듯한데 삼십 분만 늦어져도

신기하게 다음날 피로도가 배가 된다. 그렇다고 지금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 사람이 아니란 걸,

스스로 반복해 온 행동을 보면 알기에. 그녀는 그냥 숙제를 하기로 한다.


뭔지 모를 약간의 비장함과 함께 K가 책상에 앉는다. 정신없는 책상 위, 그녀는 목표물을 발견한다.

'파란 그물망 필통'. K의 애착 필통이다.

흐물텅 거리는, 필'통'이라고 부르기에도 멋쩍은 필기구 주머니에는 그녀의 애착 필기구들이 꽤 있다.

그중 얇고 가벼운 색연필을 꺼내 들었다.



언젠가 형광펜에 지겨워질 때였다. 다른 글자와 종이를 무시하고 혼자 확 튀어버리는 형광펜이

다른 것들과 조화로워 보이려 노력하지 않고 본인을 뽐내려 한다는 느낌이 든 순간이었다.

'내가 중요해! 나는 중요해!'

시끄럽고 지겨웠다.


K는 합정에 있는 중고 서점을 애용한다.

'애'를 붙여도 될지 모를 정도로 빈번한 이용객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고서점을 간다면 꼭 그 지점을 갔다.

그날도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사고 집에 가는 길에 문득 형광펜을 대체할 무언가를 찾고 싶었다.

무작정 휴대폰의 지도어플을 눌러 근처 문구점, 문방구, 소품샵 등의 이름으로 검색한다.


'아, 있다!'


맞은편에 있다던 문구점은 큰 가게들 사이에 끼어있다시피 존재하는 작은 매장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다지 인자해 보이지는 않는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K는 슬그머니 인사를 하고 크지도 않은 매장의 제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치 사장의 눈은

'폐업 이틀 전에 저 여자는 뭘 사러 왔나..' 하는 듯,

무심하면서도 약간의 호기심을 드러내는 듯했다. K는 그렇게 마음대로 느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발걸음은 사장님과 거리를 넓히는데 집중했다.

'아 없나..'

K도 자신이 정확히 뭘 필요로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나대는 형광펜을 내쫓고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앉아줄 무언가가 있을까 하는 기대였다.

하지만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그녀도, 사장님도 몰랐기 때문에

그녀의 탐색시간은 더 길어지고 불안해졌다.



어쩔 수 없이 점점 그녀의 발걸음은 입구 쪽으로 가까워지고 동시에 사장님과도 가까워진다.

'아 이제는 빼박이다..!'

안 그래도 한적한 가게에 문 열고 들어오자마자 정면만 보고 쌩 들어가더니

이젠 두리번거리며 가게를 훑는 여자라.

이 타이밍은 딱 가게 주인이 조그마한 CCTV 모니터로 나를 주시하기 시작하거나,

'뭐 찾는 거 있슈?' 대사로 얼른 쫓아내려 하는. 바로 그 타이밍.


이때.


'허.. 이거.. 다...!'


딱 연필 굵기의 맨들맨들하고 둥근 색연필.

중앙에는 'KIRIN'이라는 문구가 반듯하게 박혀있었다.

'키린이라... 일본 제품인가...? 오...!'

K는 자타공인 애주가이지만 술에 대한 지식은 그다지 관심이 없다. 어차피 맛있게 먹으면 그만인 것을 다들 어쩜 그렇게 이 술 저 술 먹는 법, 역사, 도수, 향을 다 기억한단 말인가.

그래도 이론은 부족할지언정 수많은 실전 경험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아마

'기린 맥주' = '일본'

가 매칭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K는 필기구는 일본이 잘 만든다는 사실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마치 벼룩시장에서 수많은 물건들 속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그 색연필은 앞 뒤로 색이 달라서 양쪽으로 깎아놓으면

한 개당 두 가지의 색을 사용할 수 있었다!


세상에! 이건 진짜 대박이다.


하나. 얇은 두께감으로 많이 넣어도 애착필통에게 무리가 가지 않았고

둘. 일타쌍피 기능덕에 두 자루를 사면 무려 네 가지 색상을 이용할 수 있었다!

셋. 그리고 일본제품이라는 것까지.


....


K는 그때 당시 이 색연필을 처음 만나게 된 순간을 회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책상 구석에 꽂힌 커터칼을 드르륵 올린다.


' 맞아 그랬지...'

K는 오른손으로 그 칼을, 왼손은 색연필을 쥐었다.

그녀의 왼손에는 앞뒤로 심이 다 부러진 대머리 색연필이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숙제를 해결한다.

방에는 두루마리 휴지, 갑 티슈 두 가지가 있다.

평소였다면 한 장으로 널찍한 갑 티슈를 뽑았을 테지만

어제 거울 앞에서 화장을 고치다 저 갑 티슈에 남은 티슈가 단 1장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손을 길게 뻗었다가 이내 가까이 있는 두루마리 휴지를 들어 두 칸을 뜯었다.

갑 티슈라면 비교적 정사각형에 가까워 어디로 튀어도 파편을 받아줄 수 있는데

두루마리 휴지는 많이 뜯더라도 기다란 직사각형이다. 나무 파편을 어디까지 받아줄 수 있을까?

찰나의 계산과 시뮬레이션이 거쳐간 K의 머릿속, 두 칸이 적당하다는 결론은 낸다.

동시에 각도를 잘 조절해서 조심히 깎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슥-

스슥-

쓱-


요즘 학생들은 학교에서 태블릿으로 공부한다던데,

나는 샤프도 아니고, 연필깎이도 아니고, 칼로 연필을 깎네.

요즘 애들은 이런 거 할 줄이나 알까.. 우쭐하는 K다.


자연스럽게 K는 엄마를 떠올린다.


굉장히 어릴 적부터 엄마는 K앞에서 연필을 깎아줬다.

그녀의 머릿속에 최초로 연필이 깎여지는 기억에는 엄마가 있었다.


당시 일주일에 한 번 직접 집으로 찾아오시는 학습지 수업을 했었는데

처음 등록할 때 사은품 받은 노란 플라스틱 접이식 책상을 받았다.

그 앞에 엄마랑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학습지를 펴놓고 K는 처음으로 학습이라는 것을 했다.

그 학습이라는 것을 시작하기 전 '연필깎이'는 하나의 의식과 비슷했다.

이제 공부를 시작할 거야라고 말하는 듯한 신호 같았다.

엄마는 작은 휴지통을 바닥에 대고 그 위에서 칼로 연필을 깎아줬다.

사악- 스윽- 스윽-

얼마나 그 소리가 좋고 자연스럽던지, K는 하마터면 잠들 뻔했다.

마치 엄마가 잠들기 전 등을 긁어주는 듯한 기분과 비슷했다.


'우리 엄마 연필 참 잘 깎았었네.'


오밀조밀 엉성하게 깎인 연필을 내려다보며 K는 생각한다.

엄마처럼 막힘없이 주 욱 주 욱 대패질을 하고 싶었는데 항상 그게 참 어려웠다.

몇 번을 연습하고, 몇 년을 깎아봐도 엄마처럼은 되지 않았다.

연필을 잘 깎는 우리 엄마가 어린 K는 위대해 보였다.

내 친구 엄마들 중 그 누구도 우리 엄마만큼 잘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칼날에 붙어있는 조각들을 바닥에 깐 휴지 위에 툭툭 털어준다.

두 칸짜리 휴지를 야무지게 끌어모아 흔적 없이 휴지통에 넣고 다시 돌아앉았는데

K를 놀리기라도 하는 듯 대패질당한 얇은 나무조각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엄마는 이런 흔적도 귀신같이 없애는 능력자다.


나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구나.

J는 생각했다.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17화순간의 기쁨이 하루의 기쁨이 되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