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아는 생색

by 굴러가유

오늘은 굉장히 피곤했다.

나의 충동이 만들어 낸 어제의 결과물들을 열심히 주워 담느라

자려고 누운 침대에서 확인한 시간이 3시를 넘겼다.


몇 가지 충동들 중,

매일 연재를 해보겠다는 도전 때문에

서서히 절전모드에서 종료모드로 들어가는 뇌와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몸뚱이를 부여잡고

노트북을 켜서 글을 쓴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자판에 손가락을 몇 번 두드릴수록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

뭐지 나 진짜 천상 글쟁이인가.

아님 이제 뇌가 각성해 가는 단계인가.


어쨌든 썩 유쾌하지 않은 컨디션이었는데도

나는 내 미담을 남들 모르게 몇 가지 적고 자려한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일. 엄마가 출근할 때 입을 수 있게 새로 산 유니클로 체크남방을 바깥에 빼놓았다.

엄마는 옷을 안 산다. 대신 내가 산 옷들을 입는다.

덕분에 나는 내 옷을 살 때도 엄마의 취향을 고려한다. 엄마의 취향이 내 취향이 되어버린 걸까, 아님 그 반대일까.

그래도 우린 상도덕이 있어서 서로의 새 옷은 본인이 먼저 착용하지 않고서는 먼저 개시하는 법이 없다.

이 착한 효녀는 엄마가 그 옷을 탐내고 있다는 걸 눈치를 채곤 후다닥 택을 때고 다음날 바로 개시해 버렸다. 공유 가능 인증마크를 단 셈이다.

엄마랑 나는 생각하는 것도 비슷하다.

오늘 날씨는 체크무늬 셔츠를 입기에 정말 찰떡이었다. 그렇다는 건, 그걸 노리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 손에 옷을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그렇다고 옷장 바깥에 빼놓거나 안방에 가져다 두진 않는다. 그건 너무 노골적이니까.

그녀가 내 옷장을 탐색할 기회는 줘야 한다.

대신 가장 앞 쪽 잘 보이는 곳에 숨겨놓은 듯 빼놓았다.

아침에 도서관에 다녀와 옷장문을 활짝 열었다.

가냘픈 옷걸이만 댕그러니 걸려있었다.

후후... 오케. 계획대로 되었다.


이. 아빠가 먹다 남은 피자조각과 와인을 정리했다.

엄마는 음식을 남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먹을 만큼만 꺼내놓고, 그 음식물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그 엄마의 그 딸이라 그 가치관을 물려받았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니 배가 너무 고파 바로 주방으로 갔다.

아빠가 드신 것으로 추정되는 3분의 2 정도 남은 레드 와인과 손가락 두 마디 정도되는 사이즈의 bear문 피자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접시에는 피자치즈가 다 말라서 빡빡-해 보였다.

무슨 사건 현장처럼 생생한 흔적들에 의아해하며 안방에 있는 엄마 아빠에게 인사를 하러 문을 열었다.

공기가... 빡빡했다.

말로 표현하진 않지만 불과 몇 분 전 집 안에 날카롭고 따가운 모래바람이 불고 간 듯 건조하고 퍽퍽했다.

'아 엄마가 화가 났군.'

자세하게는 모르겠지만 분명 아빠의 고쳐지지 않는 태도들 중 하나가 엄마의 신경을 다시 건든 것으로 추정된다.

평소였으면 엄마의 오른팔로서 팽개쳐놓은 식탁 위의 잔해물들을 고대로 가져가 아빠에게 잔소리했겠지만

굶주린 배에 식은 치킨을 넣어보며 혼자 생각에 잠겨있다 결론을 냈다.

'오늘은 가족의 평화를 위한 우렁각시가 되어야겠군.'

혹시라도 주방으로 엄마가 나올까 남은 닭날개 하나를 빠르게 발골하고,

조용히 테이블 위의 증거물들을 나의 설거지거리와 함께 넣어 인멸했다.

난 오늘 벌어질 뻔했던 '2차 대전'을 막은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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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말곤 아무도 모르는 미담을 내 손으로 생색 좀 내보았다.

남에게 인정받는 게 아닌 이상 내가 나를 인정하는 건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거, 해보니 꽤 기분이 좋다.

그리고 그렇게 흘려보낼 수 있었던 것을 글로 적어보니 배로 좋다.

내가 꽤 괜찮은 사람 같고, 꽤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거 같고

또 다른 배려와 사랑을 실천해보고 싶달까.


자자 이번엔 누구 마니또를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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