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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mm 이하의 펜으로 날카롭고 쨍하게..

by SingleOn

사람 사는 데가 뭐 다 비슷비슷하지, 그리고 없으면 또 없는 대로 살아가면 돼.. 난생처음 해외에 가서 살게 되면서 내가 매일 되뇌던 말이다. 생활이 달라졌다고,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고 해서, 내 삶에 불평이 늘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바람과 소망이었달까?


내가 회사 아니었으면, 언제 또 이렇게 해외에 나가서 살아 보겠어. 덕분에 영어도 늘고, 우리 딸도 해외 경험을 할 수 있게 된 건데. 감사한 것만 생각하고 좋은 마음으로 있다 와야지. 남들은 가고 싶어도 못 갈 수도 있고, 내 돈 내고도 하는 경험인데… 이러면서 말이다.

맞는 말이다. 손쉽게 시켜 먹을 수 있는 배달 음식이 없으면 집에서 해 먹으면 될 일이고, 늦은 밤에 시켜도 다음 날 새벽이면 물건을 받아 볼 수 없다면 미리 계획해서 주말에 산더미만큼 장을 봤다 놓으면 될 일이다. 내 크기에 딱 맞는 고무장갑이 없으면 그냥 좀 헐렁하고 두꺼운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면 된다. 물건이 비싸면 안 사면 될 일, 그냥 다 사람 사는 세상인데 조금 불편해졌다고 유난을 떨 일은 없다.


그런데 웬걸. 못 견디겠는 순간은 항상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회사에서 일을 하는 도중 노트에 뭘 적다가 내가 평소에 쓰던 펜의 볼이 부러져 버린 거다. 물론 그 펜은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거다. 뭐 어쨌거나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어 버린 펜 때문에 회사에 비치된 펜을 잡아 들었는데, 다 너무 뭉뚝하고 두꺼운 것들만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사실 문구류 집착이 좀 심한 편이라 (우울할 때도 교보문고 지하의 문구류 코너를 한참 구경하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가까운 마트에 가서 펜을 고르는데, 전부 다 두꺼운 것들 뿐인 데다가 종류가 많지도 않았다.


중학교 이후부터 0.4mm 이상의 펜은 절대 사용하지 않는 날카롭고 쨍한 성격의 여자인데, 1.0mm 펜이 웬 말이냔 말이다. 공책의 칸들도 좁아서 글씨 하나가 칸 안에 예쁘게 들어오지도 않고, 쓸 때 힘도 더 많이 줘야 하고, 이렇게 뭉툭한 걸 대체 어떻게 쓰란 건지, 왜 얇은 펜이 없는 거지? 다양성을 그렇게 존중한다며, 왜 펜의 취향에 대해서는 다양성이 없는 거지? 케첩, 버터, 요구르트, 시리얼은 수십, 수만 종류를 갖다 놓고 팔면서 왜 문구류는 그렇지가 않은 거냐고 대체 왜!

늘 그렇듯, 나는 이상하게 아주 엉뚱하고 사소한 장면에서 폭발을 한다. 이 속상하고 안타까운 상황을 친구들과 공유하고 싶은데, 시차가 맞지 않는다. 꼭두새벽에 전화해서 잠을 깨울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최소한의 이성은 작용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인스타에 이 못 참겠는 순간을 주저리주저리 적어본다. 두꺼운 펜을 바로 부러 뜨리고 싶은 심정인데 펜은 너무 단단하고, 나는 그만큼의 힘은 없어, 그냥 여기다 끄적거려 본다며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지. 그게 뭐라고 나는 이 작은 일에 이토록 화를 내며 흥분을 하고 못 견디겠다고 앙탈을 부리고 있는 건지 말이다.


며칠 후, 소포를 하나 받았다. 종류별로 다양한 0.4mm 이하의 펜들이 가득히 들어 있는 상자였다. 아.. 내가 이렇게 또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는구나. 이런 걸 바라고 글을 쓴 건 아니었는데, 나는 또 이토록 한심하고 하찮게 굴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염려를 끼치는 걸까..


뭘 좋아할지 몰라 그냥 하나씩 종류별로 사봤다는 화실 선생님의 메모에 마음이 눈 녹듯 놓는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이런 또 호사를 받아보는구나 하면서.. 어쨌거나 나는 그 펜들로 매일 열심히 기록하며, 공부하며, 그러고 살고 있다. 하루하루 소중히 여기며, 짱짱하게, 날카롭게 사고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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