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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는 임원

by SingleOn

여기서 일을 한 지도 2년이 넘어간다. 그동안 운 좋게도 좋은 리더들과 일할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자리가 위로 올라갈수록 사람들이 더 열심히 일하고, 근면성실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임원들이 본인들의 일을 직접 처리한다.


한국 대기업 임원들의 경우, 많은 일들을 아랫사람들이 대신(?) 해주는 경우가 빈번하다. (반박 시, 님 말이 맞음. 물론 안 그런 분들도 많고, 나도 좋은 분들과 일을 한 적이 있다. 이건 그냥 전반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소견이다. ) 나의 상급자가 그 위의 상사에게 보고할 내용을 메일로 대신 써 주기도 하고, 본인이 발표할 자료의 스크립트를 써주기도 하며, 필요한 자료도 밑에서 정리해서 보고해줘야 하는 일들이 있다. 그러다 보니 가끔씩 뭔가 위에 사람들은 그냥 고민 없이 밑에서 해 주는 일을 입으로 보고만 하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기 생각과 방향이 없으니, 밑에 사람이 해온 걸 보면 막연히 ‘그건 아닌 것 같다’, ‘다른 좋은 건 없냐’고 한다.

또 본인이 의사결정을 하고 책임지면 될 일을 자기 선에서 의사결정은 못하고 계속 그 결정을 위로만 올리기도 한다. 이건 권한 위임이 안 되는 것이 문제인 건지(예를 들어 모든 사안은 사장이 결정해야 한다는) 아니면 본인이 책임지기 싫어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일이 매우 비효율적으로 진행된다는 느낌을 종종 받으며 일을 했었는데 여기서는 그런 게 별로 없다. 이유는 되게 간단하다. 보고서가 충분하지 않아도 보스가 사장과 충분히 논의를 통해 합의를 이루어서 그걸 내게 전달해 준다. 소위 말해 밑에서 헛짓을 할 필요가 없다. 지시 방향이 명확하니 나는 그걸 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방법을 좀 더 찾아보면 될 일이다.


상황에 따라 엑셀 파일을 주면 자기들이 직접 수정을 해가며 결론을 내려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정제된 형태의 보기 좋은 보고서로만 정보를 취득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날 것의 엑셀 파일을 넘길 때의 반응을 상상해 본다면, 이게 얼마나 혁신적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 거다. 엑셀에서 작업한 걸 보기 좋은 예쁜 보고서로 만들기 위해 파워포인트로 옮기고, 그걸 편집하는 번거로움을.. 숫자가 한 번 바뀌고, 가정이 한 번 바뀔 때마다 얼마나 삽질을 해대야 하는지.. 그런데 웬걸. 엑셀 파일에 수식과 함수를 걸어 두면 그걸 직접 보정하기도 하고, 자기들이 숫자를 넣으며 시뮬레이션을 해보니 뭐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최종 결정된 것만 보고서에 담아 커뮤니케이션을 하거나, 기록으로 남기면 된다.


본인의 역할이 의사결정을 하고, 정확한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라고 인지하고 있는 임원과 함께 일하면 밑에 부하 직원들이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더군다나 급하면 실무도 직접 처리하니 이건 뭐 거의 또 다른 신세계를 경험하는 느낌이랄까..

사실 우리나라는 위로 올라가면서 더 중요한 일을 하게 된다는 이유로 많은 소소한 것들을 내려놓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직접 할 줄 아는 게 없어지고, 말로 대충 때우며 일을 하는 경우도 있고, 실력보다는 정치력이 더 우선시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아랫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상사를 보니 이처럼 뿌듯할 수가 없다. 근데 생각해 보면 당연하지 않나? 나보다 돈도 많이 받고 회사에서 더 중요한 역할과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하는 게 회사 입장에서도 맞는 말이니까.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리더를 보면, 사실 나도 더 도와주고 싶고 열심히 일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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