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으로 부임받기 전까지 나는 본사에서 꽤 나이가 많은 여자 직원에 속했었다. 아마 임원을 제외하고 직원 중에서는 나이 많은 순으로 세 손가락 안에 들었던 것 같다. 사실 어느 순간부터 직장 동료로서 나보다 나이 많은 여자분들을 만나는 게 쉽지 않았다. 많아봤자 두세 살.. 어떻게 보면 다 또래라고 할 수 있는 범주였다.
여기 와서 놀랐던 점 중 하나는 나이가 나보다 20살쯤은 많은 여자 비서 분을 보고서였다. 대기업에서 ‘여비서’라는 단어를 말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있다. 그래서 놀랐고, 솔직히 좀 부러웠다. 이건 진짜 책이나 영화에서나 보던 이야기인데.. 한 자리에서 오래 근무하는 할머니 비서라니.
자회사 HR팀과 만났을 때는 더 놀라웠다. 그곳의 채용 담당자, HRIS 담당자는 50대, 60대 여자분들이셨다. 승진을 하지 않아도 그냥 자기 하던 일을 하면서 전문성을 발휘하는 모습이 너무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하얀 머리를 그대로 둔 것도 멋졌고, 경력과 연륜을 바탕으로 나를 친절하게 맞이해 주며 용감하고 대단하다고 말해 주는 데에서 따뜻함도 느껴졌다.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은 ‘안전감(Safety)’이었던 것 같다.
한국 대기업에서 일하면서 연차가 찰 수록 나도 알게 모르게 젊게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했다. 흰머리가 보이지 않도록 3주에 한 번씩 뿌리 염색을 하고, 대단히 멋지게 옷을 입고 다니는 건 아니지만 항상 차려입는 듯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고, 살이 찌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는 소리를 들으면 내심 속으로 뿌듯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게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냥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지만이 중요했다. 나이 같은 건 묻지도 않는다(실제 미국에서는 일터에서 나이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인사 담당자라 하더라도 그들의 나이를 조회할 수가 없다. 이름 옆에 생년과 나이, 그리고 현 직무에서의 연차를 기록하는 방식과는 괴리가 있다). 그래서 생각했다. 아, 나도 미국에서 일을 한다면 오래 일을 할 수도 있겠구나…
한국에서는 연차가 올라갈수록 승진에서 누락되면 일을 잘하던 사람도 어느 순간 패배자(Looser)가 된다. 그냥 그 일을 잘하던 사람인데 한정된 자리로 승진을 못한다고 해서 왜 그런 식으로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나는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며 그곳에 제 때 도착하지 못하면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여겨지는 현 직장의 모습이 과연 기업에서 말하는 것처럼 Vitality를 높이며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식인지에 대해서는 항상 의문이 든다.
참, 아이러니하다. 한국에 있었을 때는 내가 과연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을까.. 에 대해 고민했다면, 내가 여기서 주재원 신분이 아니라 그냥 직원이었다면, 아.. 나도 오래 일을 할 수 있겠는데? 오래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를 고민하게 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