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회사에서 주재원을 선발하기 위해 다양한 검증 프로세스를 거친다. 그리고 주재원으로 성공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역량에 대해서도 이미 많은 자료들이 넘쳐난다. 그중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영역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ChatGPT 활용).
회사 HR 부서에서도 이런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역량을 가진 사람을 주재원으로 파견하고자,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선발 과정을 거쳐 최고의 적임자를 찾아내느라 고군분투한다(물론 그런 과정 없이, 전임자의 퇴사로 느닷없이 어떠한 공식적 선발 과정 없이 주재원으로 오게 된 나 같은 운 좋은(?) 케이스도 있다). 이러한 회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왜 실패하는 주재원이 나오는 것일까?
· 혼자서 여러 가지 수준/범위의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잡일에서 기획까지)
보통 주재원으로 부임하게 되는 회사의 환경이 좋은 경우는 없다. 이미 안정적/체계적으로 돌아가는 해외 법인의 경우, 주재원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시스템과 여러 절차, 규범, 프로토콜, , IT 인프라 등이 이미 일정 수준 갖춰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재원을 파견 보내는 법인/지사의 경우, 혼자서 일인 다역을 해나가야 하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고, 옆에서 잘 도와주는 사람도 없다. 눈치껏 알아서 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알음알음 찾아서 배워가며 일을 처리해 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문제는 본사에서는 그렇게 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재원으로 부임받기 전에는 이러한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사에서는 이미 잘 갖춰진 시스템과 자원을 기반으로 일을 해 오고 있었던 경우가 대부분이며,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필요한 도움을 주는 동료와 선후배들이 든든하게 옆을 지키고 있다. 게다가 직급이 올라갈수록 아래에서 많은 것들을 대신 처리해주다 보니, 이 상황이 익숙해질 경우, 생각보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구나.. 를 느끼는 순간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바뀐 상황에서는 다른 태도로 일을 접해야 한다. 내가 실무도 할 수 있고, 전략도 동시에 짤 수 있어야 한다. 나 대신 엑셀로 자료를 정리해 주고, 자료를 찾아 주는 사람이 없다면, 내가 직접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내가 이런 것까지 해야 해?, 실무를 놓은 지가 언제인데 내가 이걸 왜 다시 해야 해?, 회사에서 이렇게 하나도 지원을 안 해주고 무슨 일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 아무 체계나 시스템 없이 어떻게 일을 하라고?! 등의 생각으로 반발감과 회의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이 보게 된다.
생각보다 많은 일들을 혼자 처리하게 되는 상황에서 이를 민첩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역량, 특히 기존에 안 하던 허드레/운영성 업무에서 전략을 짜고 기획을 하는 일까지를 아우룰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해 보인다.
오늘도 나는 임원/직원 이력 명부를 시스템이 아닌 손수 손(사실은 파워포인트)으로 작성하면서 본사의 요구에 의해 한 개는 ABC 순으로, 한 개는 직원 연차 순으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여기 Mike라는 직원이 연차가 어떻게 되는지 본사에서 알아서 뭘 어쩔 건가... 이런 건 시스템으로 검색하면 자동으로 되거나, 아니면 밑에 직원들이 해 주던 일인데.. 4차 산업혁명으로 많은 일들이 자동화가 되어 가고 있는 이 시점에 이걸 이런 식으로 작업한다고? 속으로 욕을 골 백번은 하며 문화적 이해/적응력보다 더 필요한 게 바뀐 일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거구 나를 다시 한번 느낀다.
· 조급증을 부리지 않는 마음의 여유와 약간은 무딘 정치력
주재원은 본사와 현지 법인 간의 업무 조율을 하는 것이 주된 업무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주재원으로 파견되기까지는 아마 본사에서의 업무 역량을 인정받은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주재원으로 파견되는 순간, 본사에서 나의 존재는 서서히 잊힌다는 점이다. 당연할 수밖에 없다. 본사에서 다루는 많은 일 중, 주재원이 파견 나간 곳은 one of them일 뿐이다. 그런데 일을 잘하고 본사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던 사람일수록 이 부분을 받아들이는 데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우, 여러 가지 면에서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현지 업무보다는 본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중요시하다 보니 시차 문제로 삶의 패턴이 바뀌어 건강이 위협을 받는 경우도 있고, 내가 본사의 소식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양한 사람과 소모적인 대화를 지속하느라 정작 업무에 집중을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물론 그런 사람이 있을 경우, 고맙게도 주변 사람은 자연스럽게 여러 정보를 얻게 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현지에서 맡은 업무를 더 잘할 수 있게 되거나,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재원은 기한이 정해져 있는 임시 직무이다. 그 기간 동안은 약간 본사와 멀어져도 여러 사내 정치에서 멀어져도 다른 방면에서 분명 얻어지는 것들이 있다고 본다. 물론 돌아갈 자리를 걱정하며, 뭣도 모르는 소리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어쩔 수 없는 것들로 인해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상황들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들을 등한시해서는 안 되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평생 있을 것도 아닌데, 그냥 있는 동안은 이곳 생활에 조금 더 집중하고, 이곳 사람들과 좀 더 잘 지내보려고 하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