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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는 중요할까?

by SingleOn

미국 오기 직전까지 한국 회사에 있을 때는 보고서를 꽤나 중시하던 조직에 몸담고 있었다. 20년의 경력 중, 10여 년 정도가 컨설턴트로 일하다 보니, 대기업으로 이직한 후, 오히려 보고서를 중요시하는 조직이라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커리어 대부분을 보고서 쓰는 일에만 집중하다 보니, 절대적인 양 면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훈련이 충분히 되어 있었고, 또 선후배, 유사 동종업계의 좋은 보고서를 볼 일도 많았다. 이런 연유로 이직 후에도 보고서 쓰는 일이 그렇게 어렵거나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성격 특성상, 원래 하던 일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일보다는, 새로운 현황이나 트렌드를 파악해서 그걸 쉽고 간략하게 정리하는 일이 더 맞기도 했다. 다만 좀 달랐던 건, 보고서의 최종 소비 주체가 외부 고객사가 아니라 내부 상사였다는 것 정도.


임원 또는 CEO를 대상으로 보고서를 쓸 때, 생각보다 굉장히 작은 부분까지 신경을 쓴다. 내용은 말할 필요도 없고, 조사, 형용사, 부사가 적절한 지, 줄간격을 거슬리지 않는지, 자간 여백은 적정한 지, 보다 읽기 쉽게, 보기 좋게 하기 위해 적절한 이미지를 사용했는지, 혹여나 질문할 수 있는 모든 내용들이 주석으로라도 어디엔가 보고서에 모두 담겨 있는지 등.. 큰 틀에서 내용이 달라지지 않을 보고서를 몇 날며칠을 수정하며 정성을 다한다. 그런데 나는 그게 좋았다. 내 장점과 특기를 발휘할 수도 있고, 손을 대면 댈수록 예뻐지는 보고서를 보면 마치 내 자식이 잘 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완벽해지는 보고서를 보며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일을 하는 것 같았고, 사실 뭔가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는 것 같은 환상에 젖어 있을 때도 많았다. 다 된 보고서를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며 자아도취감에 빠지기도 했으니까..


신기하게 여기 와서는 보고서 쓸 일이 거의 없다. 임원과 직접 회의와 토의를 통해 결정되는 사항들이 대부분이고, 증빙이 필요하거나 할 경우는 이메일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사장에게도 이메일을 통해 변경 사항이나 신규 적용 제도에 대해 설명하면 그걸로 논의가 시작되고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 심지어 엑셀 파일을 그대로 보내줘도, 그걸 보고 직접 수정해서 내게 전달해 주기도 한다. 그토록 찾아 헤매고 울부짖던 일하는 방식 혁신은 여기 있구나.. 싶었다. 생각해 보면 같은 부서, 같은 회사 사람들이 회사 내부를 관리/운영함에 있어, 형식적인 일에 이렇게 까지 많은 에너지를 들일 필요는 없는 지도 모르겠다. 서로 논의하고 토의를 통해서 더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들이 한순간의 완벽한 보고를 위해 희생되고 있는 부분도 있다는 걸 여기 와서야 새삼 인지하게 된다.


덕분에 나는 다른 일로 그 시간을 채우고 있다. 상사와 논의할 때, 다른 데에서 어떻게 하고 있나 알아보는데 전력투구를 하기보다는 내 생각을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슨 논리와 근거 자료를 더 찾아야 할까 보다는 업계 트렌드에 대해 공부하고, 조금 거창할 수도 있지만 신기하게 세상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국의 HR 제도와 우리나라의 그것이 어떻게 다른 지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예쁘고 완벽하게 쓰인 보고서가 아니더라도 일은 굴러갔다. 그러다 보니 의사결정이 빠르고, 혹시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수정하면 그만이었다.


어떤 것이 더 낫다 아니다의 문제는 아니다. 각자의 일하는 방식이 다를 뿐. 하지만 한정된 자원과 에너지로 일을 하고 있다면, 어느 부분이 더 우리 조직에 맞는지는 근본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때는 맞던 것이 지금을 틀릴 수도 있는 여지를 열어둬야 개선의 여지도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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