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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병마개를 따주던 사람들이 그리워지는

by SingleOn

회사 다니면서 와인을 마실 기회가 많았다. 같이 일하던 상사들이 와인을 좋아해서 술자리가 있으면 항상 와인을 곁들인 것도 이유 중 하나였고, 왜인지 친하게 지내던 친구나 지인들도 와인 애호가들이 많아서 두루두루 와인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렇게 풍문으로 알음알음 알게 된 와인인데, 세상에, 내가 지금 나파밸리에서 한 시간 반 거리에 살고 있네?


입국한 지 12일 만에 Social Security Number가 적힌 카드를 받아 든 날, 혼자서라도 이를 기념하겠다는 들뜬 마음에 마트에서 “Textbook”이라는 와인을 사 왔다. 한국에 있었을 때도 종종 마시던 와인이었는데, 세상에 운명처럼 이 와인 또한 산지가 나파밸리 아니던가? 그래서 보이자마자 덥석 집어 들고 집에 왔다. 그런데 아뿔싸.. 내가 혼자 와인을 따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구나.. 그래도 대학 나온 여자인데, 유튜브와 블로그를 보며 시도를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어처구니없게, 바보같이.


꾸역꾸역 정착에 필요한 행정처리를 하고, 회사 일도 해 내다가, 빠지지 않는 코르크마개 때문에 또 눈물이 났다. 아, 한국에 있을 때는 매 번 식당에서 와인을 따주던가, 아니면 같이 갔던 동료들이 해 주던 일이었는데, 여기 와서 내가 혼자 할라니, 그게 뭐라고 또 나는 남들 다 쉽게 하는 거 하나 못하고 이러고 있는 건지.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보고 싶고, 여기 혼자 있다는 생각에,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또 미친 듯이 겁이 나고 심장이 쿵쾅 거렸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냥 당연히 나는 이런 일을 잘 못한다는 식으로 인스타그램에 열지 못한 와인병 사진을 스토리로 올렸다. 그런데 기적은 다음 날 찾아왔다. 집 우편함에 새 와인 오프너가 배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좋은 와인 오프너를 사용하면 쉽게 열릴 수도 있으니 한 번 해보라는 메시지와 함께…


일터에서 나와 함께 가깝게 일을 하던 사람들은 나에 대해 잘 안다. 일 할 때는 꽤나 똑똑하고 잘난 척을 하지만 그 외 영역에서는 약간 모자란 부분이 많다는 것을.. 나는 쿨하게 그냥 와인을 못 땄다고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보고 예전에 같은 팀에서 일하던 후배가 미국 아마존에서 당일 배송으로 우리 집에 와인 따개를 보내준 거다. 세상에.. 와인을 못 땄을 때는 그냥 눈물이 났는데, 와인 오프너를 보니 대성통곡을 하게 되었다. 내가 대체 이 소중한 사람들을 두고 왜 굳이 여기에 온 거지 라는 자책과, 혼자 덜렁 남겨졌다고 생각했는데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아무 말 없이 그냥 나를 도와주고 싶었던 그 소중한 마음, 그동안 아무렇지 않은 척, 안 힘든 척 보낸 하루하루 등, 여러 가지가 복합되었던 것 같다. 사실 지금 생각하며 그렇게 대성통곡까지 할 일은 아니었지 싶다.


어쨌거나 그래서 나는 미국에 도착한 지 2주가 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Social Security Number도 받게 되었고, 와인도 혼자 딸 수 있는 여자가 되었다. 어제는 너덜너덜해지기만 하고 좀처럼 딸려 오지 않던 코르크 마개가, 진짜 신기하게 후배가 보내 준 오프너로 따니 되게 손쉽게 뿅 하고 가볍게 올라왔다. 온 우주의 기운을 받아서 그런 것으로. 자, 이제 맛있게 와인을 마셔보자!


Screenshot 2025-01-04 190910.png Social Security Number가 적힌 카드, 그리고 후배가 보내 준 와인오프너로 마법까지 따라 올라온 코르크 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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