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원으로 나가는 많은 경우는 보통 주재원들이 한 두 달 먼저 나가 현지에서의 세팅(집과 차를 구하고, 아이의 학교를 알아보는 등)을 하고, 그 사이 와이프들은 뒤에 한국에서의 생활과 짐을 정리하며 붙이고, 한국에서 짐이 도착할 때쯤 현지로 이동하는 패턴을 많이 가겨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애들의 학교 일정 등에 따라 이 마저도 좀 다를 수는 있지만..
나는 애 혼자 미국에 들어오라고 할 수가 없어 그냥 모든 걸 동시에 진행하느라, 그 당시에는 좀 고생스러웠지만, 그래도 주재원과 주재원 와이프의 삶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어서, 짧은 기간 생활력이 만랲이 되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중 정점이 이삿짐을 싸서 보내는 일이었다. 해외 이사를 한 번 해 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왜 이리 많은 짐을 이고 지고 살아가고 있는가’가 아닐까? 짐을 싸다 보면 고민이 된다. 이건 가지고 갈까, 말까.. 어떤 걸 한국에서 사가고, 어떤 걸 체류국에서 사야 하나.. 등등
어쨌거나 해외 이사를 할 때에는 어떤 항목이 어떤 박스에 담겼으며, 그것들의 수량은 어떻게 되고 대략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를 기재해야 한다. 아무래도 태평양을 횡단하는 먼 거리를 이동하게 되다 보니 보험 적용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문제는 여기서 또 나의 극성맞은 성격이 나와버렸다는 것. 평소에는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다가, 뭔가 위급/긴급 상황이 되면 나오는 극도의 완벽주의 정신.. 스스로를 한없이 피곤하게 하고 들들 볶는 그 행태…
옷을 예로 들자면, 내가 가지고 있는 스커트, 바지, 티셔츠, 니트, 남방/블라우스가 각각 몇 개인지.. 심지어 스타킹 개수까지 세서 분류하고, 그걸 엑셀 표로 만들어 수식을 걸어 놓는..
나는 나 스스로를 몹시 검소하고 패션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짐을 싸면서 알게 되는 사실이 꽤 많았다.. 와, 내가 스카프/목도리가 11개나 있었네, 정장 재킷이 이렇게나 많았나.. 세상에, 대학 때 입던 티셔츠도 가지고 있었네. 겨울은 꼴랑 3개월인데, 코트는 간절기용 코트, 겨울용 반코트, 롱코트, 털 달린 것, 털 없는 것.. 거기다 패딩류까지.. 정말 종류 별로 다 갖추고 있었구나.. 구두는 또 말해 무엇…
캘리포니아로 가는데 내가 이런 겨울 옷들도 다 가져가야 하나, 가서 필요할라나, 그래도 또 거기서 추운 곳에 여행할 수도 있으니까...
음식도 뭘 얼마나 붙여야 하는지 살림도 안 해 본 터라 뭘 가져가야 하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미국 가서 뭘 살 수 있고 없는 지도 모르겠고.. 그럴 때마다 블로그와 유튜브를 찾아보지만 뭔가 개운하지는 않다. 한국에서 사면 싸고 좋다는 것들, 미국 갈 때 다이소에서 사가야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보며 쇼핑을 하고 있노라면, 회사 일 챙기는 것도 힘든데 진짜 주저앉고 싶게 망막한 순간이 많았다. 이런 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중 3 딸아이의 한 마디.. “그냥 대강 해, 다 사람 사는 데야. 없으면 또 그냥 없는 대로 살면 돼.”
나는 그 말을 듣고 또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지금 이렇게 고생스럽게 하는 게 나 혼자 잘 살겠다고 이러는 거야? 너 고생 덜 시키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대강하긴 뭘 대강해. 너는 매사 그런 식이어서 문제야. 일을 하면 똑바로 완벽하게 해야지, 맨날 대충 하려고 하니까 제대로 되는 게 뭐가 있어!”
나는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아마 딸아이의 말이 맞다는 걸 알아서였겠지? 사실 원재가 짐을 완벽하게 싸서 미국 가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고, 얘는 진짜 없으면 없는 대로 불평 안 하고 살 아이인데, 나는 왜 이렇게 스스로를 달달 볶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으며 애한테 짜증을 내고 있는 것일까. 그러게.. 대강해도 해도 되는 데 말이다. 얘는 내가 40 넘어서도 아직 실천하지 못하는 일들을 어떻게 이렇게 미리 알아서 나에게 훈계질을 하고 있는 것이지? 네 말이 맞다. 세상 사는데 뭐 그리 많이 물건이 필요할 것이며, 없으면 또 없는 대로 살면 된다. 하지만 이 엄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최선을 다 해 짐을 쌀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