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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가겠다고 하면 될 간단한 문제

by SingleOn

갑작스러운 주재원 발령은 나뿐만 아니라 온 가족들에게도 패닉이었다. 특히 중3 여름방학을 앞두고 있는 원재에게는 더더욱..


나는 사실 미국에 오기 전까지 원재와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었다. 모든 양육은 우리 부모님이 맡아 주셨고, 늦은 시각 집에 들어가면 피곤해서 자기 바빴다. 주말에는 주로 골프를 치러 다녔고, 원재는 학원을 다녔다. 함께하는 시간이 적다 보니 사이가 나쁠 일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알콩달콩 친밀한 모녀관계도 아니었다. 그러니 원재도 얼마나 걱정이 되었을까. 서먹한 엄마와 낯설고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에서 지내야 하는 데다가 언제나 엄마로부터 내 편이 되어 주던 할머니, 할아버지도 곁에 안 계시니..


서로의 불안감과 당혹감은 준비 과정 내내 부딪혔고, 원재는 무기력증에 빠진 듯 보였다. 12시가 넘어까지 잠만 자고, 학교는 가지 않으려 하고(당연히 그럴만하다, 두 달 후면 그만둬야 할 학교에 당연히 가고 싶지 않겠지..), 그렇다고 영어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회사 인수인계에 각종 서류 준비를 하다가 집에 와서 그런 원재의 모습을 보는 나는 정말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오후, 아마 비자 서류를 준비하고 있던 중이었던 것 같다. 인생의 전체를 되돌아보듯 나의 행적을 되짚으며 모니터 앞에서 비자 신청을 하기 위한 정보를 하나하나 입력하다가 낮잠을 자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꼭지가 돌아 버렸다.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치우며 소리쳤다.


‘왜 이 세상에 날 도와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야?! 왜 나만 이렇게 매 번 아등바등 이야! 너 그럴 거면 아빠랑 가서 살아. 나도 힘들어. 더 이상은 너 못 키워! 안 데려갈 거야!...” 그리고는 갑자기 소리 내서 울어 버렸다.


자고 있던 원재 입장에서는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갑자기 맥락 없이 엄마가 나한테 소리를 지르더니 아빠한테 가서 살라고 한다. 방에서 TV를 보고 계시던 우리 엄마, 아빠는 갑자기 다 큰 딸이 목놓아 울며 손녀딸에게 소리 지르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러면서까지 주재원으로 가야 하는 건가.. 이게 대체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못 가겠다고 하면 간단할 문제를 나는 왜 온 식구들을 불안하게 만들며 이렇게 안달복달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회사도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간절하게 부탁한 것도 아니고 내가 못 가겠다고 해도 하나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 나는 왜 그 말 한마디를 못해서 이렇게 혼자 오롯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인지…


한참을 가만히 지켜보던 엄마가 날 안아주며 말했다. 원재는 우리가 키워줄 테니 아무 걱정 없이 홀가분하게 다녀오라고. 너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그동안 너무 애썼다고.

나는 또 목 놓아 울었다. 우리 집에서 내가 주재원 가는 걸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나도 살면서 한 번쯤은 외국에 나가서 살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유학을 꿈꾸던 시절도 있었고, 실제로 결혼해서 남편을 따라 외국에서 살고 온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도 했다. 과거에는 이를 꿈 꾸던 시기도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싫고 원망스럽고 힘들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한바탕 소리 내서 운 후, 나는 다시 책상에 앉아서 비자 신청을 위한 자료를 마저 입력했다. 힘들고 지친 마음은 마음이고, 일단 내 눈앞에 떨어진 과업은 마쳐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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