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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꿈은 주재원 와이프였다

by SingleOn

대학교 때 내 꿈은 주재원 와이프였다. 솔직하게는 주재원 자녀였는데, 그러기에는 난 이미 대학생이 되어 버렸고, 우리 아빠가 주재원으로 근무하게 될 경우는 없어 보였다. 주재원 혹은 교환 교수 자녀로 해외에 나가서 살다 온 친구들이 하는 영어를 들어 보면, 이건 진짜 꼭 한 번쯤 해봐야겠다 싶은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 나도 해외에서 한 번쯤 살아 보고는 싶은데 내가 직접 나가서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기는 부담스럽고, 남편 덕에 해외에 나가 언어 공부도 하면서 해외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내가 보기에는 주재원 와이프야 말로 그 당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꿈의 직업이었다.


그런데 웬걸, 43살에 내가 주재원으로 나가게 되었다. 전임 담당자가 갑자기 퇴사를 하는 바람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느닷없이.. 신(神)이 있다면, 내 소원을 끝까지 주의 깊게 듣지 못하고 앞에 ‘주재원’만 들은 건가 원망스럽고, 이제 좀 직장에서도 삶에서도 안정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40대 중반에, 이 시점에, 왜 내가 주재원…?


지금 생각해 보면, 사춘기 아이 핑계를 대거나, 이 회사에 온 지 6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거나, 나는 해외 생활에 전혀 관심이 없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영어를 못한다거나, 뭐 핑계를 대려면 안 나갈 수 있었을 방법도 많았을 것 같다. 솔직히 너무 가기가 싫었다. 그런데 왜 인지 모르게 회사에다가 주재원은 못하겠다고 말하기는 더더욱 싫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혹시나 모를, 저래서 여자는, 저래서 애 엄마는, 저래서 싱글맘은… 다른 사람들이 내뱉지도 않은 말들을 혼자 상상하며 괜한 자격지심 때문에, 내가 마치 무슨 여성운동가로서 큰 소명이라도 있는 듯, 그렇게 나는 싫다고, 못 하겠다고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못한 채, 그냥 주재원 얘기 말이 나온 지 3달 만에 Visa를 받고 미국에 오게 되었다.


2022년 10월 5일, 중 3 딸아이(이하 원재)와 143kg이 되는 7개의 여행 가방을 들고, 그렇게 나는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Screenshot 2025-01-04 183645.png 포터의 도움을 받아 승강장까지 가는 길, 미리 예약한 택시를 기다리며 가방을 지키고 있는 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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