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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의 또 다른 위기와 변화

CHANGE Season 2

by 로맹 제이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10년

사십 대 10년을 오롯이 해외 현지에서 보냈다.

그 10년이 저물 즈음 또 한 번의 변화가 찾아왔다.

예기치 않은 퇴직으로 위기 상황을 맞았고 동시에 예기치 않은 이직으로 큰 변화를 맞았다.


창과 방패를 들고, 활을 메고, 말을 타고 광야를 달린다.

어떤 적이 와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거침없이 달렸다.

앞에 나타나는 모든 적을 내가 든 창과 활로 쓰러뜨릴 수 있다 생각하며 달렸다.

30대 후반 큰 변화를 맞아 현지 법인장으로 일을 시작한 40대는 삶의 전성기였다.

앞에 나타나는 어떤 장애물, 위기 상황도 뚫고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현지 법인장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힘과 용기,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이 나를 믿고 있기에 어떤 어려움도 개의치 않고 삶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여정의 끝도 어김없이 다가왔다.


39살 현지 이직 후 8년여 동안 현지 법인장 자리를 맡아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에서 살았다.

가능하면 오랫동안 버텨보려 했으나 사업이란 것이, 세상살이란 것이 내 뜻대로 되는 법은 없다.

전 세계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는데 맞춰 제때 변신을 못하는 기업은 변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현지 법인의 운용 규모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예상은 했으나 준비 없이 회사를 떠나야 했다.

후임에게 법인장 자리를 물려주고 현지에서 준비 없이 회사를 떠났다.

하루아침에 모든 상황이 변했다.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8년 가까운 시간을 현지 법인을 경영하며 버텼지만, 회사를 떠나고 보니 모든 것이 한때의 꿈이었다. 막막했다.


집 앞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었다.

풋살경기장 만한 작은 공원이지만 수령이 오래된 큰 나무들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 작은 벤치가 서너 개 있으며 가운데는 사시사철 꽃이 피는 정원이 있는 아주 아담한 공원이다.

이 공원이 나를 위로해 주는 장소가 될 줄은 평소에 몰랐다.

한창 일할 때는 공원에 눈길을 줄 새도 없이 일하기 바빴고, 주말이면 현지 주재원들과 골프로 시간을 보내는데 쓰느라 공원이 있는지 그 공원에 무엇이 있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그러다 모든 일상이 변하고 시간이 멈추며, 매일 아침저녁으로 집 앞 작은 공원을 수십 바퀴 걸으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한 가정의 가장인 선장으로서 망망대해 같은 타지에서 내 가족이 탄 배를 어디로 어떻게 이끌고 가야 하는지 고민했다.

아이들은 현지 학교에 적응해서 10년 가까이 국제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터라 섣불리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올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 비싼 학비를 자비로 감당하며 머물 수도 없었다.

결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고뇌와 사색의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서울의 헤더헌터 회사에서 이메일이 하나 왔다.

헤드헌터가 보낸 이메일을 열어보기도 전에 '아 이거다!' 하는 직감이 들었다.

사람은 살다 보면 직감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을 만나거나 어떤 상황에 닥쳤을 때 본능적으로 느끼는 느낌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온몸의 감각이 생존 본능으로 똘똘 뭉쳐 반응하는 그런 느낌

경험을 다듬어 이력서를 만들어 보내고, 여러 번에 걸친 면접을 통과하고, 다른 기업의 현지 법인장으로 이어서 일할 수 있는 변화의 기회를 잡았다.

개인사에서 보면 기적이라고 표현할만한 일이었다.

어려운 상황들을 겪어내고, 시련을 헤쳐 나가며 지낸 지난 8년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고, 또 다른 스토리로 연결된 것이라는 사실, 나의 지난 노력이 인정받았다는 것이 뿌듯했다.


이때 경험한 것 중 아직도 인상에 남는 것이 있다.

최종 면접은 그룹 회장이 참석한 임원진 면접이었고, 한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떨리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고 면접장으로 들어섰다.

서울의 한 호텔에서 진행한 면접은 살면서 겪은 몇 안 되는 인상적 장면으로 남아 있다.

면접을 진행한 그들의 질문이나 면접장 환경이 인상 깊었던 것은 아니다.

평소 몰랐던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너무 인상적이었으며 아직도 그 감정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한 시간에 걸친 면접을 마치고 나오며, 그 결과에 상관없이 속이 뻥 뚫리듯 후련하고 시원한 느낌, 그 통쾌한 감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현지 신생 법인의 법인장으로 혼자 감당해야 했던 수많은 상황들이 치열한 전투였듯, 또 다른 변화를 위한 면접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치열한 전투의 하나였다.

최종 면접을 마치고 나오는 발걸음은 너무 가벼웠고 속에 있던 묵은 체증들을 털어내 버린듯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합격 여부를 떠나 그 이벤트 자체가 나를 정화하는 의식이었다.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그 모든 것이 다 소중한 성장의 재료가 된다는 것을 아직도 배우고 있는 중이다.


40대라는 전성기가 2년 남은 시점에 다시 다른 기업 법인장으로 일을 시작했다.

근무하는 지역이 달라 홀로 현지 지방 도시에 머물며 주말 부부도 아닌 변형된 형태의 현지 기러기 아빠 생활을 시작했다.

저물 것 같던 40대 전성기는 그렇게 다시 이어졌다.

이 역시 행운이었고 운이 좋았다.

우리 가족을 태운 배의 선장으로, 가던 방향 그대로 키를 잡고 갈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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