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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자리

어느새 아이들이 커 버렸다.

by 로맹 제이

서른 살 결혼했다.

그해 아들이 태어났고, 이태 뒤 딸이 태어났다.

일산에서 서울로 이사하고 몇 해 뒤 아들이 7살 딸이 5살이 될 때 가족을 데리고 해외로 나가 주재 근무를 시작했다.

생소한 현지 생활에 힘겹게 적응하고, 몇 해 뒤 현지에서 이직하고 8년 뒤 퇴직하고, 다시 이직하고.

그렇게 세월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한국 살이를 완전히 정리하고 이민 가는 것이 아니라, 2~3년 동안 잠시 나갔다가 코에 바람 좀 넣고 들어온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나선 길이었다.

곧 들어올 생각으로 떠났던 터라, 타던 차도 처갓댁에 맡겨놓고 떠났다.


2000년대 중반 시작한 해외 살이가 10년을 넘기고 있었다.

40대 10년을 다 채우고 나니 2010년대 중반이 되었다.

이제 50대라는 또 다른 미지의 세상으로 들어서려 하고 있다.

일한다고 바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우여곡절을 겪고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서서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회사의 법인장으로 일을 시작했다.

조직이 바뀌니 새로 할 일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혼자 떨어져 정신없이 일하며 지내는 동안 몇 년이 훌쩍 흘렀다.

수시로 가족을 만나러 비행기를 타고 두 도시를 오가며 지냈다.

두 도시는 직선 거리로 1,800Km, 공항 이동 시간과 수속 시간을 제외하고, 비행 시간만 세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아이들과 아내 곁에 내가 머물고 있다는 생각으로 오가며 지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옆에서 매일 살을 부대끼며 아이들의 섬세한 에너지까지 감지하며 사랑이라는 에너지를 끊임없이 전달해야 제대로 아빠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현실을 핑계로, 현실적 한계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커가는 아이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 감정, 의식들을 알아챌 수 없었던 탓에, 관계의 어딘가는 구멍이 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별문제 없이 아내와 관계, 아빠와 아이들과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을 아들 옆에 아빠가 없었다.

사춘기이니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거니 생각하면서 무심히 지낸 과오가 시간의 벽을 넘어 한참 뒤 나타났다.

수시로 틈만 나면 전화로 이메일로 메신저로 아들과 대화를 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전화로 내면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러한 소소한 대화 대신 부재한 아빠를 대신해 엄마와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아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무거운 부탁들 했던 듯하다.


내 역할을 아내에게 맡겨두고, 아들에게 전가하며, 혼자 타지에서 생이별 상태로 몇 년을 지냈지만 나는 그것이 최선이고 잘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들의 마음속에 커다란 구멍이 나고 있었다는 것을 한참 뒤 알았다.

그렇게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은 커가고 있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얼굴을 맞대고 마주 앉아 아이들과 대화를 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과 혹은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벌어진 소소한 일들을 들어주고 대화를 나누며 일상을 나누지 못했다.

땅이 넓어 비행기로 이동하는데 대여섯 시간이 걸리는 거리이니 마주 앉아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고, 아들이 성장하면서 아빠로부터 받아야 할 그 무엇이 빠져 버렸다.

일하며 돈을 벌고 최고 좋은 학교에서 교육을 시키면 다 잘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아이들의 사춘기를 같이 보내지 못하고 아내에게 오롯이 맡겨 놓았다.

잘하리라, 잘해주리라 믿었다. 아니었다.

나는 내가 할 일을 그저 미뤄 놓았을 뿐이었다.


주의를 기울이면 보이는 것들을, 거리가 멀다고 애써 외면하고, 바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스스로 만든 허상을 쫓아, 그런 일상에 젖어 사느라,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하고 몇 년의 귀중한 시간을 그냥 흘려보냈다.


그렇게 떨어져 지내는 사이 아이들은 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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