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을 달지 않으면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십여 년 전 여름
이직한 회사의 그룹 교육을 두어 달에 걸쳐 마치고 해외 근무지를 향해 홀로 비행기에 올랐다.
트렁크 하나 달랑 끌고 회사의 명령을 받아 현지 회사를 설립하러 낯선 도시로 출발했다.
8년 전 신생 법인의 법인장 경험을 무기로, 다시 無의 상태에서 새로 시작했다.
낯선 도시에는 사무실도, 직원도, 사업도, 집도, 아무것도 없다.
말 그대로 맨땅에서 다시 시작한다.
뒤돌아 볼 새 없이 현지 조직과 사업 기반을 만들어 나갔다.
우선 임시 사무실을 구하고, 현지 직원을 채용하고, 회사 설립을 외부 에이전시에 의뢰하면서 착착 일을 진행시켜 나갔다.
1년 이내에 현지 사업 기반을 만들고 안정된 업무 환경을 만든 뒤, 가족을 데리고 올 작정이었다.
10년간 즐기던 골프도 끊고 사무실과 게스트하우스를 오가며 오로지 새로운 일에만 집중했다.
일도 일이지만, 혼자 지내는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도 만만찮았다.
우선 베이스캠프를 만들어야 했다.
인간이 사는데 기본적인 것들이 필요하다.
흔히 ‘의·식·주’라고 하지만, 나의 경험으로 ’주·식·의‘가 맞는 순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우선 잠자고 머무는 곳이 기본적으로 마련되어야 그다음 것을 준비해서 제대로 생존할 수 있다.
보급부대가 없는 상황에서 홀로 현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선 거처를 마련한 다음, 먹는 것, 입는 것의 순서로 중요하다는 경험을 많이 했다.
새로운 여정을 위해 먼저 베이스캠프설치가 필요했다.
현지 주재 근무를 하며 2~3년마다 이사를 다녔다.
계약 기간이 있어서 옮기기도 했지만 좀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옮겨 다녔다.
옮겨 다닌다는 것이 심리적 안정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인적 차이는 있겠지만, 특히 어린 나이의 자녀에게 이사라는 소소한 변화도 부모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충격이라는 것을 한참 뒤에 알게 되었다.
꽃을 가꾸듯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자녀를 키워야 하지만, 이사를 하면서 혹은 나의 일하는 자리가 변하면서 그런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한국 소도시에서 옮겨 다니지 않고 평범하게 사는 모습도 가끔 상상해 보았다.
옮겨 다니는 유목민 생활의 피로함이 몰려오면, 한 곳에 정착해 사는 안정적인 삶이 부러웠다.
그러나 현지에서의 삶은 잠시도 한 눈을 팔 새가 없다.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 일이 터지고, 그런 빈틈이 생기면 바로 현지 생활이 예기치 않은 어려운 상황으로 연결되었다.
그래서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신속하게 베이스캠프를 만들고 일을 속도감 있게 해나가야 했다.
10년가량 현지 근무하며, 임대할 집과 사무실을 찾아다니는 일은 익숙했던 터였다.
몇몇 부동산 중개인들에게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한 달 가까이 일과를 마치고 오후에 중개인들과 집을 보러 다녔다.
나서기 전 나름의 기준을 몇 가지 정했다.
첫째, 예산 내에서 비용은 되도록 저렴할 것.
둘째, 주택 환경은 트렁크 하나만 가지고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집일 것.
셋째, 계약 기간은 1년으로 할 것.
어느 평일
일과를 마치고 좋은 물건이 있다고 으스대는 젊은 중개인을 따라나섰다.
큰 아파트 단지 9층 집주인이 문을 열고 맞이한다.
안경을 쓰고 수염을 기른 조그마한 체구의 마른 5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중년 남자다.
그의 안내로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와 가족이 쓰던 가재도구들이 모두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고, 안방에는 큼 침대와 이부자리가, 작은 방에는 책상과 붙박이 장이 있다.
조그만 베란다에 차를 마실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다.
나름 신경을 쓴 가재도구와 내부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다.
왜 집을 비우고 떠나느냐고 물었다.
아들이 사는 다른 도시로 곧 이동할 예정이라 했다.
혼자 지냈냐고 물었다.
아내와 같이 지냈는데 최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제야 가재도구나 집안 곳곳의 인테리어에 그의 아내의 손길이 묻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집을 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집은 마음에 들었으나 그의 아내가 병치레를 하고 세상을 떠난 안방 침대가 눈에 선했다.
꺼림칙했다.
그러나 회사를 설립하는 바쁜 일정을 소화해 내야 하는데 마냥 집을 보러 돌아다닐 수도 없다.
비용, 주택환경, 계약기간의 세 가지 조건이 맞기에, 단호하게 결정했다.
집을 찾아다니느라 벌써 한 달을 소비했고,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그 집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새로운 도시에서 가족과 신설 법인의 터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며칠 후 계약서를 작성하고 트렁크를 끌고 조그만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집안을 청소하고 방하나는 침실, 또 다른 방하나는 독서와 명상, 그리고 밀린 일을 하는 공간으로 만들어 거주를 시작했다.
가끔씩 집안을 청소하다 보면 군데군데 흰색 긴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다.
이제는 이 세상에 없지만 알지 못하는 노부인이 머물며 남긴 흔적이다.
암으로 아내가 세상을 떠난 그 공간에서 중년 남자 집주인은 얼른 떠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세상을 떠난 노부인 흔적을 보며 괜한 생각을 할 틈도 없이, 1년간 그 공간을 베이스캠프로 새로운 등정을 이어 나갔다.
삶은 결정의 연속이다.
살면서 결정을 해야 할 때, 중요한 것은 시간과 비용이었다.
그 당시 주어진 시간과 예산을 감안하면, 그곳이 최선의 선택지였다.
그렇게 최선의 선택지라 생각하며 베이스캠프로 옮겨서 일을 진행시켰고, 1년 뒤 인근 더 넓은 빌라를 계약하고 가족을 불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꿈같은 4년을 보냈다.
날씨 좋은 주말 거실 소파에서 누워 맞은편 빌라를 바라본다.
맞은편 집 지붕 저 너머로 큰 아름드리나무가 바람에 일렁인다.
이층 침실에서 저녁 해질 무렵 똑같은 나무가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천천히 일렁거린다.
지금도 그 키 큰 나무들을 나도 아내도 가끔씩 회상한다.
삶은 위기 상황과 꿈같은 현실이 반복되었다.
나름의 기준을 정하지 않고 현지 생활을 하다 보면 모든 것이 귀찮고 장애로 느껴질 수 있다.
소위 가성비가 턱도 없이 한심하다.
비싼데 질은 형편없는 경우가 다반사다.
특히 IT 법인을 운영하다 보면 현지 IT 엔지니어들의 급여는 다른 직종에 비해 월등하게 높으나 생산성은 형편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채용과 해고를 반복하며 조직의 질을 끌어올리고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낯선 도시에 도착해 한 달가량 머물다 집을 구해 떠나는 날, 한국인 게스트 하우스 사장의 아쉬워하는 눈길을 잊을 수 없다.
장기 투숙으로 머무는 주재원이 많을수록 게스트 하우스의 수익이 좋으니 당연한 일이다.
내심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가성비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조건을 달지 않는다는 것은 그 무엇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기한다는 것은 내가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내려놓고 감정적으로는 하기 싫지만 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과정은 결국 나를 내려놓는 과정이었고 삶의 과정이었다.
감히 심오한 철학을 논할 처지는 아니지만, 삶이란 결국 나를 없애는 과정이며 나를 없애고 보면 모든 일들이 나름의 이유가 있고, 모든 경험이 나름의 가치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