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을 깨지 못하는 새를 위한 변호
나는 8년째 이직을 고민하고 있다.
8년이면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동안 마음속으로 수백 번 사표를 쓰고, 또 접었다. 하지만 결국 매일 같은 출근길을 걸으며 생각한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막상 들여다보면 별 것도 아닌데, 고작 그것마저 손에서 놓는 일이 왜 이렇게 무서운지.
오랫동안 그것을 내 용기가 부족해서, 야망이 작아서, 의지가 약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이토록 변화를 두려워했던 데는, 어쩌면 의지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는 이유들이 있었다.
1988년, 하버드의 새뮤얼슨(Samuelson)과 제카우저(Zeckhauser) 교수는 한 가지 실험을 했다.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더 나은 선택지를 여러 개 제시했을 때, 그들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결과는 명확했다. 사람들은 더 나은 대안이 있어도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쪽을 비합리적으로 선호했다. 이는 '현상 유지 편향(status quo bias)'이라 불린다.
심지어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현재에 머무르고자 하는 경향성은 더 강해졌다. 가능성이 많으면 떠나기 더 쉬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인 것이다. 컬럼비아 대학의 한 실험에서, 6종류의 잼을 진열했을 때는 손님의 30%가 잼을 샀지만, 24종류로 늘리자 구매율은 단 3%로 떨어졌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비교는 불가능해지고, 포기해야 하는 쪽의 가능성은 더 선명해지며, 잘못 골랐을 때의 후회는 더 무겁게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결정 자체를 미뤄버린다.
비합리적 이어 보일 수 있는 이 현상에 대한 답은, 우리 뇌의 구조 속에 있다. 인간의 뇌는 체중의 약 2%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쓰는 에너지의 무려 20%를 소비한다. 그래서 뇌는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에너지를 아끼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가능한 모든 일을 자동화하고, 익숙한 패턴으로 굳히고, 한 번 형성된 회로는 좀처럼 놓지 않는다. MIT의 신경과학자 앤 그레이비엘(Ann Graybiel)의 연구는, 한 번 만들어진 습관 회로가 의식적으로 끊어내려 해도 뇌 안에 그대로 새겨진 채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매일 하던 일을 그대로 하는 것은 뇌에게 거의 공짜다. 반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은, 그 굳어진 회로를 거슬러 새로운 길을 내야 하는 일이다. 변화에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드는 것은 당신이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물의 기본 설정값이다.
1979년, 카너먼(Kahneman)과 트버스키(Tversky)는 인간의 의사결정에 관한 중요한 연구 중 하나를 발표했다. 같은 크기의 이득과 손실을 두고, 인간은 손실을 약 2배에서 2.5배 더 크게 느낀다. 만 원을 잃었을 때의 고통은, 만 원을 얻었을 때의 기쁨보다 두 배쯤 무겁다는 것이다.
익숙한 도시를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할까, 안정적인 관계를 정리하고 혼자가 되어볼까, 오랫동안 해온 전공을 접고 다른 길을 가볼까... 우리는 새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의 가능성과 당장 잃게 될 것들을 결코 동등한 무게로 저울질하지 않는다. 잃을 것은 애초부터 두 배 이상의 무게로 저울 한쪽에 얹혀 있다. 우리가 합리적인 비교를 한다고 믿는 그 순간에도, 저울은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미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서, 그 방향이 더는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같은 길을 계속 간다. 매몰비용 오류(sunk cost fallacy)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만큼이나 했는데 이제 와서?'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5년을 만난 연인, 10년을 다닌 회사, 20년을 매달려온 꿈. 투자한 시간이 길수록 추는 점점 무거워지고, 이를 두고 떠나는 게 점점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시간들은 내가 어느 쪽으로 가든 이미 사라진 시간이다. 머무른다고 그 세월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매몰비용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과거에 발이 묶여 미래를 인질로 잡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것을 머리로는 안다고 해도, 현실에서 우리의 발은 좀처럼 떨어지질 않는다.
많은 자기 계발서들이 말한다. "긍정적으로 상상하라. 성공한 미래의 자신을 그려보라. 매일 아침 원하는 모습을 시각화하라." 그러나 뉴욕대학교의 가브리엘레 외팅엔(Gabriele Oettingen) 교수가 20년에 걸쳐 발견한 사실은 정반대였다. 외팅겐은 다이어트에 도전하는 사람들, 구직 중인 졸업생들, 짝사랑을 고백하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반복해서 같은 실험을 했다. 한 그룹에게는 목표를 이룬 자신의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하게 했고, 다른 그룹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도록 했다. 결과는 통념을 뒤엎었다. 긍정적인 미래를 더 생생하게 상상한 사람일수록, 실제로 그 목표를 이룰 확률은 더 낮았다. 살은 덜 빠졌고, 취업은 더디게 됐고, 고백은 더 미뤄졌다.
머릿속에서 이미 이상적인 미래를 충분히 맛본 뇌는, 마치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만족감을 느낀다. 새로운 삶을 사는 나를 머릿속에서 충분히 즐기고 나면, 목표를 이미 이룬듯한 기분에 실제적인 동력은 오히려 약화되는 것이다. 막연한 상상은 행동의 연료가 아니라, 행동을 미루는 진정제로 작용한다.
외팅엔이 그 대신 제안한 것은 WOOP이라는 4단계 방법이다: 소망(Wish) - 결과(Outcome) - 장애물(Obstacle) - 계획(Plan).
먼저 내가 정말로 바라는 변화를 한 문장으로 떠올린다(Wish): "현 직장을 떠나 다른 길을 찾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내가 얻게 될 좋은 결과를 구체적으로 그린다(Outcome):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늘 출근이 더 이상 두렵지 않은 삶."
이제 시선을 미래에서 거두어 내 안으로 돌린다. 그 소망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들여다본다(Obstacle). 진짜 장애물은 거의 언제나 내부에 있다. '이력서를 쓰려고 노트북을 열면, 30분도 안 돼 막막함에 압도되어 다른 일을 시작한다.', '새 분야를 알아보려다가도,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며 위축되어 그만둔다." 이때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내가 반복적으로 멈추는 그 구체적인 순간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그 장애물이 다음에 또 나타났을 때 내가 무엇을 할지 한 문장으로 미리 정해둔다(Plan: "만약 X가 일어나면, 나는 Y를 한다."). "막막함에 압도되면, 노트북을 끄지 않고 일단 한 줄만 쓴 뒤 일어난다." 거창한 다짐이 아니라, 발이 걸려 넘어지는 바로 그 지점에 작은 디딤돌 하나를 미리 놓아두는 일. 메타분석 연구들은 이 한 문장이 행동 변화에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일관되게 증명한다. 본능이 발동하기 전에 다음 행동을 미리 자동화해 두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이렇게 썼다.
이 문장이 오랫동안 사랑받은 이유는, 누구나 그 투쟁의 무게를 몸으로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알을 깨는 데 큰 힘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힘을 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라고 말했다. 변화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망설임과 두려움은, 사실 우리에게 아직 선택할 자유가 남아 있다는 증거다. 정말로 떠날 수 없는 사람에게는 망설임조차 사치다. 망설일 수 있다는 것은, 곧 떠날 수도 있다는 뜻이고, 머물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떠나지 못했던 시간을 두고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이렇게 묻고 싶다. '나는 지금 과거에 발이 묶여 머무는 것인가, 아니면 머무르는 쪽이 지금의 나에게 더 좋은 선택이라 판단해 머무는 것인가?' 이 질문에 정직해질 수만 있다면, 머무는 것도 떠나는 것도 모두 자유의 한 형태가 된다. 내가 고른 자리에 스스로 서 있다는 감각, 내 인생의 선택들은 모두 내 손에서 나왔다는 감각. 그것이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자유다.
오늘도 나는 떠나지 못할지 모른다. 내일도, 1년 뒤에도 그럴지 모른다. 어쩌면 끝내 떠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머무름이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내 판단의 결과이기를, 그리고 언젠가 떠나는 날이 온다면 그것 또한 나를 위해 충분히 숙고한 선택이기를. 나에게 자유롭게 묻고, 자유롭게 답하며, 자책 없이 살고 싶다.
출처:
Arkes, H. R., & Blumer, C. (1985). The psychology of sunk cost. Organizational behavior and human decision processes, 35(1), 124-140.
Graybiel, A. M. (2008). Habits, rituals, and the evaluative brain. Annu. Rev. Neurosci., 31(1), 359-387.
Iyengar, S. S., & Lepper, M. R. (2000). When choice is demotivating: Can one desire too much of a good thing?.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79(6), 995.
Kahneman, D., & Tversky, A. (2013). Prospect theory: An analysis of decision under risk. In Handbook of the fundamentals of financial decision making: Part I (pp. 99-127).
Oettingen, G., & Gollwitzer, P. M. (2010). Strategies of setting and implementing goals: Mental contrasting and implementation intentions.
Samuelson, W., & Zeckhauser, R. (1988). Status quo bias in decision making. Journal of risk and uncertainty, 1(1), 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