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 이야기
내게는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가 있다. 누구의 소유도 아닌 그냥 우리 집 막내 귀염둥이 보리라는 강아지이다. 나이는 4-5살? 언제부턴가 이 아이의 나이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저 우리 가족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어렸을 때 서울 친척언니네 집에 놀러 갔다가 강아지에게 간식을 줘보라던 권유에 주려다가 무서워서 후렉 피하곤 하다가 처음 보는 사람이 자기를 놀리는 줄 알고는 강아지가 내 손을 콱 물었던 기억에, (그 강아지는 참 영리하게도 내가 어린아이인 줄을 기막히게 알았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강아지라는 강아지는 다 무서워하곤 하던 겁쟁이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강아지들이 무섭기보단 크게 짖는 강아지들은 '겁이 많구나.' 싶고, 사회화가 덜 된 강아지들은 '일찍부터 분양되었구나.' 싶더라. 그냥 그 생명체가 작고 소중하고 다 귀엽기만 했다. 강아지공포증을 언제 극복한 걸까? 생각해 보니 남동생이 보리를 데려오곤 같이 집에서 반강제로 기르게 된 후 귀찮기만 하고 성가시기만 하다 느꼈던 강아지가 내게 먼저 다가오고 곁을 내어주어 친해질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이 아이로 말할 것 같으면 지나가는 강아지에게도 무관심하고 자기 갈 길만 쭉쭉 나아가는 정말 마이웨이 기질의 강아지이다. 잘 짖는 법이 없기도 하고 낯선 이 가 집 근처에서 시끄럽게 굴면 짖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에 대해 엄청난 경계심이 없다. 잘은 모르나 우리 보리는 모든 강아지들처럼 가족 중에도 자기를 아껴주는 대상에 대해 굉장한 친밀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순하디 순한 우리 강아지 보리는 본가인 섬에서 사는 데 그래서 나는 우리 보리가 뭍에 나오지 않고 섬에 있는 상황에는 '섬집 아기'라고 부르곤 한다. 사랑하는 우리 보리 언제까지 우리 옆에 있어주면 좋겠는데. 어릴 때 기르던 강아지와 이별 후 다시 동물과 살기는 여간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다. 남동생 덕분에 이 강아지와 이렇게 가족이 되어 살아오지만, 양육권 다툼이 일듯 우리는 누가 보리의 엄마냐 아빠냐를 다투며, 누가 더 챙기고 번거로운 것은 내가 다 하는데 네 맘대로냐 투덜투덜 다투기도 한다. (유치한 현실 남매의 흔한 일상이다)
보리에 대해 조금 더 말하자면 이아이는 잘 때마다 옆에 와서 딱 붙어 엉덩이를 내 배나 등에 대곤 웅크리고 자곤 한다. 많은 연예인을 동경하는 편은 아니지만 한 연예인을 화려한 모습에 반하기 보다 유명한 애견인이라서 꾸준히 좋아해 오곤 했는데 그 한 여자 가수를 보면 참 많은 생각이 들곤 한다. 상처받은 아이들을 데려와 사랑으로 기르고 양육하며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까지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이 참 많이 멋지다.
외로워 보이는 자기 집 강아지를 위해 한 마리 더 입양해 오고 싶지만, 책임감 없이는 섣불리 데려올 수 없다며, 고민은 계속 하지만 선뜻 둘째 강아지를 데려오지 않게 된다던 대학 동기가 있었다. 작은 생명에 대한 책임은 생각보다 무거운 선택이라던, 그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세상의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그 고유함을 사람들이 함께 잊지 말아줬으면 한다. 나 또한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보리를 놓지 않겠다. 사랑한다 우리 보리. 얼른 보고 싶구나. 세상의 모든 애견인 애묘인 분들 존경한다. 우리는 우리를 돌보며 작은 생명까지도 책임질 용기를 가진 사람들 아니겠는가. 쓰담쓰담 우리 보리. 얼른 본가에 내려가 작은 자동차 보조석에 태우곤 '보리차 뽑았다 널 데리러 가.'를 외쳐보고 싶구나. 사랑한다 우리 보리. 우리 집 사랑둥이 막내. (보리를 만나게 해 준 남동생에게도 애정을 표한다.) 언젠가 이별할 것을 알지만 그래서 더 후회 없이 아껴주리라 다짐하는 동이 튼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