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 99일째, 밤사이 차곡차곡 눌려 쌓인 차가움의 온도가 거실의 공기를 누르고 있는 아침이었다. 재촉하지 않아도 이 차가운 공기는 뜨꺼운 공기의 무게로 바뀌겠지만, 마음 속으로 더움의 공기를 재촉하듯 서두름에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아침을 맞이했다.
한편의 시로 차가운 공기를 따스한 마음으로 녹이며 하루를 연다.
제목: 그리움
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이 있다
만나지 말자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하지 말라면 더욱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이 인생이고 그리움
바로 너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서 - 나태주
오늘,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끝까지 읽었다. 처음엔 그저 어린 소녀의 성장기를 담은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우리가 너무 쉽게 지나치고 외면했던 것들-차별, 편견, 침묵,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윤리-에 관한 묵직한 질문들이 조용히 숨어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러나 결코 아무 일도 아니었던 감정들이었다.
소설 속에서 스카우트의 선생님은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비판한다. 유대인들은 위대한 사상을 가진 민족이고, 그런 그들을 괴롭히는 건 말도 안 되는 야만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장면을 읽으며 나는 오히려 그녀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의 마을, 메이콤에서 흑인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었는지를 떠올렸다.
주인공 소녀 스카웃 역시 그 부조리를 느끼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어쩌면 그 침묵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장면에서 멈춰버렸다. 생각이 달라서, 외모가 달라서, 목소리가 작아서... 우리는 너무도 쉽게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내몰아왔다. 나도 모르게. 아니, 알고도 모른 척하며.
책의 제목이 왜 ‘앵무새 죽이기’인지, 그 상징을 이해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해를 끼치지 않는 존재, 그저 노래하고 날아다니는 새조차, 우리의 무관심과 편견 속에서는 먼저 희생된다.
살인자로 누명을 쓴 흑인 청년 톰 로빈슨은 그런 앵무새였다. 부 래들리 역시, 어린 시절 실수로 인해 집에서만 지내는 괴물로 규정되었지만 결국 아이들을 조용히 지켜보던 존재였다.
우리 사회는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배제한다. 낙인찍는다. 때론 말없이, 때론 적극적으로.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또 한 마리의 앵무새를 쏜다.
책 속에서 스카웃의 오빠인 젬은 선물로 공기총을 선물 받는다. (그 때 당시 미국의 시대상이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아빠는 말한다. “절대로 앵무새는 죽이면 않된다.” 난 이 것이 상징하는 의미는 우리는 성장하면서 모두가 한자루의 총을 선물 받는다. 다만 그 총을 언제 누가 주었는지 모르르 뿐이다.
더 무서운 건, 우리는 늘 그 총을 누군가를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 내 손에 쥐어주었는지도 모르게, 어느 날 당연한 듯 쥐고 있었고, 우리는 눈빛으로, 말로, 침묵으로 방아쇠를 당긴다.
피해를 주지 않는 존재조차 해를 입히는 이 사회에서, 진짜 괴물은 누구 였을까?
나는 문득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 쥐어진 총으로 내 곁에 있던 앵무새 또는 주변에 있던 앵무새를 죽였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르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는 듯 했다. 비단 내가 앵무새를 죽이고 있지 않더라도 난 그들을 지키려 했던 적은 있었는지를 스스로 묻게 되었다.
이 책 속의 또 한 명의 주인공 애티커스 핀치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말없이 보여준다. 무엇이 용기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그는 세상에 필요한 어른이었고, 우리 모두가 되고 싶은 어른이었다. 아이들이 도덕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아니라, 그걸 삶으로 보여주는 어른이 왜 필요한지를 이 책은 묻는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결국 스카우트의 성장이자, 동시에 나 자신의 성장기도 된다.
책장을 덮으며, 나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앵무새를 지키는 일은 거창하지 않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마음, 그 자리에서 세상을 보려는 연습,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게 손을 뻗는 용기. 그것이면 충분하다. 오늘 나는, 앵무새를 죽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며칠 전, 우연히 들었던 한 문장이 때문이었다. 대구에서 열린 강연에서 고명환 작가가 지나가듯 말했다.
“요즘 <앵무새 죽이기>를 읽고 있는데, 정말 인상 깊고 가슴에 와닿는 이야기가 많더라고요.” 그 말은 단순한 추천이 아니었다.
어딘가 깊은 데서 울려 나온 문장처럼 가슴에 내려앉았다. 나는 곧장 이 책을 찾아보았고, 책 소개란의 단 몇 줄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단지 오래된 고전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신념에 대해 묻는 이야기라는 느낌. 그것이면 충분했다.
요즘처럼 불확실한 시대엔, 옳은 일을 믿고 지키는 것이 더욱 어렵다. 정직이 어리석음으로 치부되기 일쑤고, 용기는 종종 경솔함으로 오해받는다. 그래서였을까. <앵무새 죽이기>의 첫 장을 펼치며 나는 바랐다. 이 책이, 내가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조용한 안내서가 되어주길. 그리고 누군가를 대하는 내 태도가 조금 더 단단하고 온전해지길.
지난주 토요일, 5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지 호기심이었다. 누군가의 짧은 한마디에 이끌려 선택한 책. 하지만 그 선택은, 예상보다 훨씬 더 깊은 감정들을 내 안에 만들어냈다.
3일 만에 책을 완독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마감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나는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시간이 부족한 것도, 집중이 어려운 날들이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 책 앞에서는 모든 핑계가 무의미해졌다. 그만큼 책이 나를 붙잡았다.
처음 이 책을 선택했던 이유보다 훨씬 큰 것이 내 안에 남았다. 감동과 용기, 그리고 신념. 그것은 말로 설명되기보다, 마음 한쪽에 조용히 스며들어 자리를 잡았다. 쉽게 흔들리지 않을 어떤 단단한 것.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마음의 중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주말 동안 미뤄두었던 운동을 마치고 볼일이 있어 외출을 했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비가 내렸을 거라 생각했는데, 대구의 거리에는 하얀 눈처럼 고요한 것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그것은 눈이 아니라, 바람에 흩날리다 떨어진 벚꽃 잎 들이었다.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지 않고 바닥에 내려앉은 그 잎들은, 차가운 계절의 끝과 따뜻한 계절의 시작이 포개진 듯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4월의 눈은 이렇게 하얗고, 동시에 분홍빛이었다. 그 풍경 앞에서 나는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봄이 그렇게, 아주 조용히 도착해 있었다.
올해는 벚꽃이 핀 줄도 몰랐다. 언제 피었는지도, 며칠 전부터 조용히 피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오늘, 그것들이 이미 거의 다 졌다는 사실만이 분명했다. 지고 있다는 말도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다. 길가에 서 있는 나무들은 꽃잎을 떨군 채, 어느새 연둣빛 잎사귀만을 남기고 있었고, 그 잎들은 햇살 아래에서 잔잔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 잎들이 다시 한 번 공중에서 춤을 췄고 그 순간, 작년 이맘때 즈음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바람이 불고, 꽃잎이 흩날리던 어느 오후. 어쩌면 벚꽃은 매년 같은 시기에 피고 지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매번 다르다. 올해의 벚꽃은 너무도 조용히 피었고, 더 조용히 져버렸다.
작년 4월이 떠올랐다. 아내는 3월 초에 퇴원해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의사는 회복을 위해 매일 산책을 권했다. 그 말이 우리에게는 일상의 지침이 되었고, 덕분에 우리는 벚꽃이 가장 만개했던 시기에 유원지로 향하곤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거의 매일같이.
그땐 길을 따라 만개한 벚꽃 아래를 나란히 걸었다. 아내는 조심스러운 걸음이었고, 나는 그 속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특별한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지만, 매일의 풍경과 공기의 온도가 지금처럼 선명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그 시간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조용하고 깊은 의미로 남았는지 알 수 있다.
오늘, 바람에 휘날리는 꽃잎 사이로 그때의 풍경이 겹쳐 보였다. 시간이 그렇게 멀리 간 것도 아닌데, 벌써 계절 하나가 바뀐 것처럼 마음이 멀어진다. 사람의 기억은 잊혀지는 것 아니라 다시 피어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벌써 1년하고도 한 달이 지났다. 그토록 더디게만 느껴졌던 시간도 결국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갔다. 마치 내 마음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시간은 제 속도로 지나가 버렸다.
그렇게 흘러간 날들 속의 아픔과 시련은, 이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내 가슴 한켠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오늘처럼 어떤 장면이 겹쳐질 때, 마음이 그 순간을 다시 불러낼 때, 눈시울로 흘러나오는 감정은 아직도 그 시간의 온기를 품고 있었다. 추억이라는 건 그런 것이 아닐까. 아프지만, 아름답고. 멀어졌지만,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는.
오늘, 집 앞 벚꽃길을 홀로 걸었다. 1년 전 이맘때, 아내와 함께 걸었던 그 거리를 조용히 되짚어 보았다. 지금은 혼자였지만, 그날의 공기와 그날의 꽃, 그리고 그날의 감정은 여전히 나와 함께 있었다. 사람은 잊지 않는다. 그저, 살아가는 사이사이에 간직할 뿐이다.
이발을 하고, 반찬 몇 가지를 사서 병원에서 간단한 진료를 받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바쁜 하루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의 작은 일들을 하나씩 채워가며 시간을 보냈다. 지친 것도, 특별히 들뜬 것도 없이 평온한 걸음으로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마침 퇴근하던 아내와 현관 앞에서 마주쳤다.
시간이 잘 맞았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내는 내 손에 들린 봉지를 힐끗 보더니, "뭐 맛있는 거 사왔어?" 하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말투도 표정도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 순간이 무척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내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벚꽃 아래를 함께 걷던 그날의 아내가 떠올랐다. 기억은 이상하게 불쑥 찾아오고, 감정은 예고 없이 올라온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아마도 이런 순간에 더 자주, 더 쉽게 울컥하게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 괜히 말을 둘러댔다. 하마터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붉어진 눈시울을 아내에게 보일 뻔했다. 요즘 들어 감수성이 예민해졌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괜히 눈시울이 자주 붉어진다며, 농담처럼 넘기곤 했지만 아마 들킬 뻔한 그 감정이 진짜였던 것 같다. 자칫하면 한 달짜리 꼬투리를 잡힐 뻔한 위기를 넘기는 순간이었다.
아내와 저녁을 나누고 나서, 책상 앞에 앉아 오늘 정리해둔 서평을 마지막까지 다듬었다. 조용한 밤, 집중하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마무리 짓는 이 시간이 요즘 들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내일이면 금주 100일째 되는 날이다. 누군가에겐 별것 아닐 수 있는 숫자지만, 나에겐 충분히 의미 있고 조용한 성취다. 거창한 계획을 세운 건 아니다. 다만, 나만의 프로젝트를 새로 시작할 참이다.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방향을 정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일. 그것만으로도 삶은 조금씩 바뀌어 간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한다는 것.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내일 아침은 분명 오늘보다 상쾌할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하루를 이렇게 자신 있게 기대해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오늘은, 그렇게 조용한 확신 속에서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