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 115일째, 아직은 아침 창 틈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피부에 닿는 순간 차갑다는 느낌이 든다. 아침 햇살은 따스한데 아직 그 안에 품어 있는 바람과 공기를 데울 정도의 시간이 부족한 계절의 어느 즈음인 것 같다.
제목: 꽃그늘
아이한테 물었다
이담에 나 죽으면
찾아와 울어줄 거지?
대답 대신 아이는
눈물 고인 두 눈을 보여주었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서 - 나태주
분주한 아침이 끝나고 책상에 앉아 새로운 책을 펼쳤다. 오늘부터 읽기 시작한 책은 블로그 이웃인 여르미작가의 추천으로 선택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나를 보내지 마>
책의 두께가 상당했다. 그러나 얼마전 앵무새죽이가, 쓰기의미래, 등등 이제 책의 두께에 위압감을 느끼는 수준정도는 지나간 것 같다. 읽다 보니 작가들이 왜 책을 두껍게 쓰는지 아주 조금 이해할 것 같다. 글은 써도 써도 할말이 많을 것 같다.
주말은 이 책과 함께 보낼 예정이다.
이건 순전히 내 주관적인 생각인데, 소설은 처음 100페이지까지 집중하지 않으면 이후를 따라갈 수 없다. 거의 모든 소설이 복선이 깔리는 부분이 100페이지 이내에 있어서 사실 책의 처음은 대체 무슨소리를 하려고 하는 거지?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책 역시 처음은 그랬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넘기는 속도가 빨라진다. 그리고 난 이후에는 엉덩이를 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소설의 매력이다.
오전에 그렇게 책을 읽고 운동을 시작했다. 오늘은 밥프록터의 <부의 확신>에 담긴 내용이었다. 오늘 나를 깊게 생각하게 만든 단어는 “지배”라는 단어였다.
매번 이 단어를 선택할 때 고민을 한다. 그러나 오늘 난 이 ‘지배’라는 단어에 완전히 ‘지배’되었다. 운동 내내 지배라는 단어와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운동을 마치고 계란을 다시 꺼냈다. 그렇다 다시 계란을 꺼냈다. 그러나 오늘은 냄비에 담았다. 전기레인지가 갑자기 어제 저녁부터 작동을 했다.
그렇게 고생을 시켜놓더니 아무렇지 않게 어제 저녁에 잘 되는 녀석을 보고 뭐라고 제대로 투덜되지도 못했다. 아내에게 틀키면 안되니까... 후츄만 조용히 하면 된다.
레인지에 불을 켜고 타임을 맞춘 뒤 샤워를 하고 나와 오늘은 편하게 점심을 해결했다.생각해보니 어젠 너무 경황이 없어서 사진도 찍지 못했다. 어젠 정말 그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잘삶아진 계란으로 점심을 먹고 외출을 했다. 주말동안 배고픈 중생 두명을 구제하려면 장을 봐야 한다. 오늘은 오랜만에 다시 군영외마트로 향했다. 그곳은 항상 붐비는 곳이라, 입장 전 번호표를 뽑고 대기해야 한다.
평일 오후였지만 대기 인원이 50명이 넘었다. 나는 180번을 뽑았고, 전광판엔 128번이 떠 있었다. 잠시 고민했다. 그냥 돌아갈까? 하지만 이럴 줄 알고 책 한 권을 챙겨온 터였다. 밖에 놓인 방갈로 그늘 아래 앉아 조용히 책을 펼쳤다.
그때였다. 이미 와서 앉아 있던 모녀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딸이 말했다.
조만간 지인 결혼식에 가야하는데 입을 정장이 없어 새로 옷을 사야 한다는 말을 했다.
엄마는 벌써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응수했다.
“내가 그때 좀 더 큰 옷 사라고 했지? 왜 살 뺀다고 딱 맞는 거 사더니, 결국 또 사게 되잖아.”
딸도 지지 않았다.
“살이 잘 안 빠지는 걸 어떡해. 나도 빼보겠다고 했지, 뺀다고는 안 했잖아.”
그들의 말은 점점 날카로워졌고 결국 엄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냥 가자!”고 말하며 차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조용히 책을 덮었다. 생각보다 흥미로운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흥미로웠으나 시끄러워 자리를 옮기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 순간 난 보았다. 딸의 손에 들려 있는 번호표를.
그리고 140번이 적혀있었다. 전광판은 135번을 가리키고 있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 아주 현실적인 계산이 빠르게 흘렀다.
‘만약 저 딸이 엄마를 따라 가버린다면… 저 번호표는 어떻게 되는 걸까?’
소중한 1시간이 저 종이 한 장에 달려 있었다.
엄마는 걸어가고, 딸은 서 있었다. 나는 속으로 묻고 싶었다.
“혹시 그냥 가실 거면 번호표 저 주시면 안 될까요?”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 순간조차, 나는 체면과 거리낌을 지켰다.
결국 딸은 엄마를 따라가며 소리를 질렀고, 운전석 쪽으로 걸어가 차 문을 열었다. 나는 아직도 딸의 손에 들려 있는 번호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딸이 손에 들고 있던 번호표를 거칠게 바닥에 던지고 차를 몰고 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빠른 발걸음을 옮겼다. 누가 볼까 싶어 조심스럽게 걸었고 바닥에 구겨져 있는 번호표 위에 발을 슬쩍 얹었다.
사실 안그래도 되는데 나도 모르게 일단 발을 얹게 되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종이를 주워 아무 일 없던 듯 손에 쥐었다.
잠시 뒤, 전광판엔 140번이 떴다. 나는 구겨진 번호표를 펴서 카운터에 건넸고 직원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와중에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좀 덥네요.”
예상보다 많은 지출을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집에 돌아와 오늘의 에피소드를 글로 옮기며 난 생각했다. 만약 오늘 책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나는 그늘 아래 앉지 않았을 것이다. 차에 가 있었을 테고, 그렇다면 그 모녀 곁에 앉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모든 건 책 한 권 덕분이었다. 역시 독서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정작 책은 한 줄도 읽지 못했다. 책은 역시 조용한 곳에서 읽어야 한다는 진리를 나는 다시 한번 깊이 깨달았다.
그리고 또 하나 사람은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겨진 번호표 하나에도 기회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지켜보는 마음, 기다리는 인내, 그리고 아주 약간의 용기가 모이면 어떤 날은 작은 종이 한 장이 몇 시간을 구원하기도 한다.
어제의 계란 폭탄 사건으로 힘들고 자책했던 나를 위로하듯, 오늘은 하루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나를 반겨주었다. 오늘의 교훈은, 그래서 꽤 단순했다.
삶은 생각보다 훨씬 더 우스꽝스럽고, 놀랍고, 기적적이라는 것을 오늘 또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