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 119일째, 세찬 바람소리에 눈을 뜬 아침이었다. 대체 봄 날씨가 어떤 것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아침이다. 매년 4월 마지막 아침이 이렇게 추웠던가?
TV에서는 예년의 날씨라고 하는데 이제는 예년날씨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흡사 태풍처럼 들이치려는 바람 때문에 창을 닫고 명상을 시작했다.
제목: 꽃.2
예쁘다는 말을
가볍게 삼켰다
안쓰럽다는 말을
꿀꺽 삼켰다
사랑한다는 말을
어렵게 삼켰다
섭섭하다, 안타깝다,
답답하다는 말을 또 여러 번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리고서 그는 스스로 꽃이 되기로 작정했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서 - 나태주
다행히 어제 발생했던 대형 산불은 오늘 오전까지 60% 이상 진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까지 인명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다는 뉴스에 마음을 쓸어내렸다.
짧은 안도의 한숨을 쉰 뒤 조용히 TV를 껐다. 재난 속에서도 이렇게 하루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에, 별다른 말 없이 감사한 마음을 가만히 삼켰다.
그리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처럼 두 사람을 현관까지 배웅했다. 떠나는 뒷모습이 현관문이 닫힐 때까지 조용히 바라보다가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오늘도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새로운 책 한 권을 펼쳤다. 4월 한 달 동안 나는 주로 자기계발서를 읽었다. 스스로를 다잡고 다그치고 나아가기 위한 방향을 고민하는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느껴졌다. 편향된 독서가 마음을 한 방향으로만 이끌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오늘부터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하기로 했다. 고전과 인문학.
조금 더 오래된 이야기, 조금 더 깊은 질문들을 통해 나를 알아가는 시간을 만들기로 했다. 성급하게 앞으로만 가려 하지 않고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볼 수 있는 책들을 고르기로 마음먹었다.
변화를 크게 선언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오늘 책을 펼치는 이 순간부터 달라지기로 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오늘 손에 든 책은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이었다.
곧 여름이 다가오는 이 계절에 뜬금없이 크리스마스 캐럴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곧 스스로 되뇌었다. 독서에 계절이 따로 있을 리 없지. 그것은 결국 단지 핑계일 뿐이라고.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주저 없이 책을 선택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워낙 유명한 이야기였다. 어릴 적부터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익숙하게 접해왔던 내용이지만, 정작 원작 소설을 직접 펼쳐본 적은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크리스마스 캐럴의 내용은 대충 이렀다. 솔직히 고백하면 난 이 책의 제목도 크리스마스 캐럴이라는 것을 책을 선택하면서 알았다. 정말 부끄러운 일아다.
난 몇일전까지만 해도 이 내용의 제목을 “구두쇠 스크루지영감” 또는 “세명의 유령과 크리스마스(이 뜬금없는 제목은 뭔가 싶다)” 정도로 대충 알고 있었다.
부끄럽지만 얼마전까지 책이란 것 자체가 나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랬기에 지금, 독서를 조금씩 삶의 일부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이 시기에 이 책을 고른 것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익숙하다고 해서 진짜 아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이미 몇 번이고 경험해 오고 있다. 단지 스쳐지나간 이야기와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으며 읽어내리는 이야기는 분명 다를 것이다. 오늘, 그렇게 나만의 작은 ‘계절을 거스른 독서’가 시작되었다.
오전 독서를 마치고 나서 운동을 시작했다. 땀을 조금 흘리고 나니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막내가 시험기간이라며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책가방을 무겁게 짊어진 채 현관을 들어서는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한 과목만 치르고 왔을 뿐인데 피곤하다며 금세 소파에 몸을 눕혔다. 말을 길게 잇지 않고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는 막내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비록 아이 셋을 키우는 동안 나는 일에 치여 돈 벌러 다니느라 바빴지만, 그런 와중에도 부모의 촉은 무뎌지지 않았다. 세 번째 아이를 키우면서 생긴 미세한 눈빛 하나, 작은 표정 변화 하나를 읽어내는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오늘 같은 날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느낌상 이건 결과가 썩 좋지 않다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이럴 때 가장 바보같은 질문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시험을 잘 봤어?"
그 질문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집안 공기는 급속히 얼어붙을 것이다. 마치 한여름에도 눈보라가 몰아치는 알래스카 한복판처럼 말이다.
지금도 바깥바람이 세차게 불어 아직 거실에 온기가 가득 차지 않은 이 집 안에서 굳이 그런 냉랭한 공기를 추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용히, 가만히 묻지 않는 것도 때로는 배려라는 걸 아이를 키우며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잠시 눈을 붙이겠다고 한다. 아주 세심하고 편안한 말투로 그렇게 하라고 했다. 혹시 배가 고프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라는 친절의 멘트도 섞어서 말이다.
샤워를 마치고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여전히 삶은 계란 두개와 두유로 보충하고 다시 조용히 책상 앞으로 향했다. 오늘은 특별한 약속도 외출 계획도 없는 날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나만의 기록 나만의 흔적을 꺼내어 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노트북 화면을 열고,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렸다.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한 순간이 잠시 스쳐갔지만, 이상하리만치 오래 머물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장면들이 하나둘씩 불현듯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확한 나이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5~6살 즈음인 어린 시절 인천 만석동 부둣가에서 뻘이 가득한 바닷물 속에 하반신을 담그고 있었다.
아버지의 거칠지만 따뜻한 손에 이끌려 흰색 팬티 한 장만 입은 채 대나무 낚싯대를 들고 있었던 기억과 함께 거센 파도 소리 대신 끈적한 뻘밭과 낚싯대 끝을 바라보며 작은 망둥이를 기다리던 그 짧은 순간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놀랍게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떠올린 적 없는 장면이었다.
기억 속에 덮여 있던 어떤 오래된 서랍이 오늘 조심스럽게 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따뜻함과 그리움이 함께 밀려왔다. 이래서 사람들이 추억을 글로 남긴다고 했던 것일까.
오늘, 나는 그 말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잊혔다고 생각했던 기억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조용히 숨어 있었던 것뿐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던 감동적인 시간이었다.
추억의 시간을 조용히 접어두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저녁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은 막내도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고 했다. 평소 같으면 반가운 말이겠지만 이상하게도 메뉴를 정하는 순간이 제일 난감하다.
당연하게도 세 식구의 입맛이 늘 일치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무얼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 결국 아내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카톡으로 아내에게 물었다. “갈비탕, 볶음밥, 샌드위치” 세 가지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더니 아내는 여느 때처럼 단번에 대답하지 않았다.
“샌드위치에는 뭐 들어가는데?”
항상 그렇다. 무언가를 제안하면 단순히 ‘그래’ 하고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 “야채, 참치, 햄, 계란.” 이 네 가지를 말하자, 마침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오늘 저녁은 샌드위치로 먹어요~.”
평소보다 빠른 승인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더 깊이 묻지 않았다.
막내의 입장은 묻지 않기로 했다. 때로는 다수결이라는 명목으로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는 게 가족의 화목을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도 막내는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마도 이미 익숙해진, 말없는 수긍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주말에 마트에서 사온 재료가 넉넉히 남아 있었다. 빵 사이로 한 겹씩 정성스레 채워 넣으니 그럴듯한 샌드위치가 완성됐다. 셋이서 조용히 둘러앉아, 샌드위치를 들고 이른 저녁을 해결했다.
누군가의 선택이 또 누군가의 양보가 만들어낸 평범한 식탁의 풍경 속에서 거창하지는 않았지만 나쁘지 않은 저녁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넌지시 막내와 시험 결과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기다렸다는 듯 막내는 자신이 기대했던 점수에 미치지 못했다며 조심스럽게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속으로 ‘아빠를 닮아서 그런 걸 어쩌겠냐’며 웃어넘기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묵묵히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대화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면서 대학 진학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아직은 한참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조금씩 현실의 언저리를 건드리기 시작하는 것 같다.
요즘은 가능한 한 막내의 의견을 먼저 듣고 따라가려 노력하고 있다. 사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안다. 조언이란 이름으로 아이의 삶을 대신 설계할 수 없다는 것도.
하지만 부모의 마음이라는 건 늘 그런 이성적인 기준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걱정이 앞서고 불안이 불쑥 고개를 들면 어느새 내 말이 막내의 말 위에 올라서 버린다.
막내가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레 꺼내려 할 때, 나는 또 나의 언어로 덮어버린다. 오늘도 그랬다. 녀석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말끝을 흐리고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깨달았다. 오늘은 여기까지가 좋겠다고.
더 붙들고 앉아 이야기하면 아마도 내 안 깊숙한 곳에서 웅크리고 있던 꼰대의 그림자가 꿈틀대기 시작할 것 같았다. 조언을 가장 한 간섭, 걱정을 핑계로 한 통제의 단어들이 너를 위한 부모의 말이라는 무기로 아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멈췄다. 일단 담임선생님과의 1차 진로 상담을 마치고 그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때는 오늘보다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조용한 마음으로 한 사람의 부모가 아닌 한 사람의 인생 선배로서 대화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저녁을 먹고 막내는 조용히 독서실로 향했고 아내는 익숙한 자세로 소파에 몸을 기댔다. 나도 아무 말 없이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늘 그렇듯 셋은 각자의 자리에서 말없이 하루를 마무리했다. 같은 공간 안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온도로 시간을 보내는 이 조용한 풍경이 이제는 당연하게 느껴진다.
다정하지 않아도 평화롭고, 특별하지 않아도 충분한 밤. 그렇게 오늘도, 각자의 방식으로 하루를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