쟤가 먼저 싸우자 그랬어요
국민학교시절 아니 그전부터도 나는 체격도 왜소하고 상당히 나약했다.
나의 부실한 체격이 걱정되었는지 요즘은 거의 모든 아이들이 의무적으로 가지만 당시에는 비교적 흔하지 않았던 태권도장을 보내줬었다.
하지만 도장에 가면서부터 내 몸엔 알 수 없는 시퍼런 멍들이 온몸 여기저기 들기 시작했다.
어딜 맞은 것도 아닌데 자꾸 몸에 멍이 들어오니 태권도장도 계속 다니지 못해 한 두 달 만에 그만둬야 할 정도로 나약했다.
그래서였을까 유난히도 나를 우습게 보고 괴롭히는 아이들이 제법 많았던 것 같다.
대부분의 나를 괴롭히는 아이들의 레퍼토리는 단순했다.
“너는 엄마 없다며? 누구누구는 엄마도 없대요~~”
그러면 나는 화가 났지만 물리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쩌다 화라도 내거나 대들면 괜스레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그렇게 놀림을 받거나 대들다 얻어맞고 집에 가면
그래도 나에겐 엄청 무서운 막내형이 있어 막내형에게 고자질했다.
내심 형이 나를 괴롭힌 아이들을 혼내주길 바랐지만 형은 병신같이 처 맞고 다니냐며 차라리 때리고 오라고 오히려 나를 더 혼내곤 했다.
몇 번 그런 일들이 있고 난 후부터 나는 또다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맞았을 때 더 이상 아무에게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국민학교 4학년때의 일이었다.
반 친구들 중 가장 날라리인 꼴통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 이후로 A라고 칭하겠다. ) 이놈은 허구한 날 만만해 보이는 아이들이면 남 녀 구분 없이 괴롭히고 노는 게 일상인 놈이었다.
하루는 어떤 이유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놈이 나를 괴롭히는데 꽂혀 하루종일 괴롭히다 학교가 마칠 시간이 되었는데도 그만두고 싶지 않은지 종례가 끝나자마자 나에게 찾아와 학교 뒤로 따라 나오라고 했다.
나는 싸우고 싶지 않았고 무섭기도 했지만 A의 선전포고를 들은 반 아이들의 등에 떠밀려 반 강제로 끌려나갔다.
싸움구경이 얼마나 재밌는 구경거리인데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반 친구들은 나를 둘러싸고 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했다.
학교 뒤편에서 A와 내가 우리 반 아이들 수십 명에게 둘러싸였고 곧이어 A의 무자비한 폭행이 시작되었다.
나는 나를 마구 때려대는 A를 등지고 양 팔로 내 머리를 감싼 채 허리를 숙여 내 얼굴을 보호한 상태로 한참을 계속 맞기만 하다가 나도 모르게 몸을 돌려 휘두른 주먹이 그놈의 얼굴에 명중했다.
신나게 계속 맞기만 하다가 한번 주먹을 휘둘렀는데
그게 하필 얼굴에 명중해 A는 바닥에 뒹굴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렇게 세게 맞은 거 같지도 않은데 왜 저렇게 고통스러워하지?
잠시 후 A가 몸을 추스르고 일어섰을 때 비로소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있었다.
하필 그 한 번의 주먹질이 그놈의 왼쪽 눈에 맞아 눈가가 찢어져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당황했지만 덤덤하게 내가 이겼으니 앞으로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얘기한 후 집으로 갔다.
사실 좀 떨면서 얘기했던 것 같다.
나는 A의 얼굴이 피범벅이 된 일이 두려워 집에 가서 막내형이 오자마자 그 사실을 얘기했다.
혼이 날 각오를 하고 내가 사고 친 것 같다고 자백을 했는데 오히려 형은 잘했다고 문제 생기면 형이 다 책임질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A는 왼쪽눈에 안대를 하고 왔고 담임선생님이 A의 얼굴을 보고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A는 나한테 맞아서 눈이 찢어졌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나를 불러서 사실관계를 확인하려 했고 나는 선생님께 전날의 일들을 모두 사실대로 얘기했다.
나는 싸울 생각이 없었는데 A가 나를 학교뒤로 데려갔고 나는 일방적으로 계속 맞기만 하다가 한번 휘두른 주먹에 운나쁘게도 저렇게 됐다고 말씀드렸다.
모든 내용을 확인한 선생님은 그럼 A가 먼저 잘못한 거니 둘이 화해하고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라고 대충 훈계정도만 한 뒤 더 이상 이일을 따져들지 않았다.
신기한 건 A도 나에게 먼저 사과를 하였고
그날 이후 A는 나를 비롯해 학교에서 아무도 괴롭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즘 같았으면 상당히 심각해졌을 만한 일이었지만 그 시절엔 모두가(심지어 당사자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시절이라 그날 이후로도 A의 부모님을 통해 항의가 들어온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그 일이 있고 난 이후 소문이 난 건지, 아니면 고학년이 되어서 그래도 애들이 좀 컸다고 그런 건지 이제는 학교에서 나를 괴롭히는 친구들이 급격하게 줄었고 학교생활이 조금은 재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