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연결되는 세계
에스파냐 함대를 이끌고 마젤란이 전 세계를 일주할 무렵, 서아시아와 인도 그리고 중국은 서열정리가 끝나고 완고한 제국 질서가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세력 간 우열을 다투는 전쟁은 거의 끝이 나고 통합된 거대한 제국 앞에 안정기가 도래합니다. 이 역할을 맡은 제국을 소개하자면, 서아시아에서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 인도에서는 무굴 제국, 아시아에서는 명과 청 제국입니다. 물론 전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1500년대로 넘어갈수록 제국 질서는 점차 확고해지기 시작했고 1600년대에 접어들면 거의 안정기에 접어듭니다. 그러나 서아시아, 인도, 동아시아 역시 소빙하기의 위협을 피할 순 없었고 이 시기에 수차례 기근과 전쟁을 겪습니다.
서아시아의 오스만 튀르크 제국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오스만 튀르크는 튀르크족의 작은 부족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들 역시 이슬람 교로 개종한 이후, 소아시아(지금의 튀르키예 영토) 지역에서 점차 세력을 넓힙니다. 오스만은 다른 이슬람 제국과는 다르게 서아시아 지역보다는 동유럽 지역으로 적극 진출합니다.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키고 오늘날 동유럽 대부분을 차지한 오스만 제국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까지 포위하여 공격할 정도로 유럽에 가장 큰 위협이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3개의 대륙에 걸쳐 제국을 건설한 덕분에 그 질서를 유지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동유럽에서는 기독교인이 다수였고 서아시아 지역에서는 이슬람교가 다수였지만, 튀르크 인은 소수였으며, 이집트에서도 이런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서아시아 지역이 여러 종교의 발흥지답게 유대교를 비롯한 여러 교회 분파가 공존하고 있어 통치하기가 매우 까다로웠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내건 방법은 2가지였습니다. 다양성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고 자치권을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스만은 동유럽 지역이나 서아시아에서 기독교 남자아이를 징집하여 이슬람교로 개종시킨 다음, 군사훈련을 시켰습니다. 이들은 예니체리(새로운 군대)라고 불렸으며, 당시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군사력으로 자라났습니다. 특히 화약을 사용하는 주로 사용하는 예니체리의 강력함은 오스만 제국의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법은 일부 자치권을 허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 공동체를 조직하고 해당 범위 안에서 일정 부분 자치권을 인정하되,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통치방식은 효과가 있었고 오스만 제국이 장기간 유지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강력한 군대와 다양성 인정,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통치방식이지 않나요?
서아시아에서 오스만 제국이 커져나가자, 오늘날의 이란 지역에서는 사파비 왕조가 등장하여 오스만과 대결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이슬람교 중에서도 시아파 계열의 왕조였으며, 지금의 이란의 원형을 이룹니다. 사파비 왕조의 등장으로 인해 오늘날의 시아파와 수니파의 지역 대결 구도가 점차 완성되기 시작합니다.
인도에서는 몽골제국의 후예라 불리는 무굴제국이 북인도에서 출발하여 남인도로 정복을 이어갔습니다. 다수가 이슬람교도였던 이들은 기존 인도의 종교인 힌두교와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리하여 인도 역시,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칩니다. 비 이슬람교도에게 부과하였던 세금도 폐지하고 힌두교를 믿는 공주와 무굴제국의 황제가 결혼을 하면서 문화 융합을 시도합니다. 효과는 확실했고 무굴 제국은 1600년대에 남인도의 대부분을 점령합니다. 이 시기에 포르투갈 상인이 인도에 도착한 것이죠. 사실 포르투갈 인들은 인도 경제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대포를 장착한 함선이 인도양 무역에 개입하긴 했지만, 무굴 제국의 거대한 힘 앞에 포르투갈은 캘리컷(고아)이라는 지역만 점령하여 무역을 이어나갑니다.
인도에서 강력한 무굴제국이 힘을 뻗치고 있었다면, 아시아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조공책봉 질서, 즉 상호 간에 서열을 인정하고 공존을 도모하는 국제관계가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중국대륙에서는 몽골족을 몰아내고 다시 한족 왕조인 명나라가 등장합니다. 한반도에서도 고려가 조선으로 바뀝니다. 일본에서는 1100년부터 이어진 무사 정권이 좀 더 강력한 영향력을 뻗치기 시작합니다. 조선과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책봉(직위를 수여받음)을 받고 선물을 바치는(조공) 형태로 안정적인 외교관계를 이어갑니다. 중국 역시 1300년대 잠깐 해상으로 진출하지만, 이내 흥미를 잃고 동아시아의 맹주 자리에 만족합니다.
안정적인 동아시아의 상황에 나비효과를 일으킨 것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였습니다. 포르투갈 상인은 머나먼 항해 끝에 일본에 도착하였고 여기서 중요한 화약무기를 전해줍니다. 바로 조총입니다. 조총은 동아시아 정세를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당장 100년 넘게 지속된 일본의 혼란기가 조총중심의 보병대를 운영하는 무사에 의해 통일됩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조선을 침략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역사에는 임진왜란이라고 적혀있죠. 결과는 일본의 철수로 전쟁은 끝났지만, 중국의 상황이 완전히 뒤바뀝니다.
만주에서 힘을 비축하던 유목민 왕조인 청나라가 중국을 집어삼킨 것입니다. 이 혼란의 과정에 조선도 휩싸입니다. 한국사 시간에 들어봤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입니다. 전쟁은 1600년대 중반까지 이어집니다. 청이 중국을 완전히 점령하고 반란을 제압하면서 다시 동아시아는 안정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소빙하기를 피해 갈 순 없었고 1700년대까지 엄청난 기근에 시달립니다. 그러면서도 동아시아는 성장을 계속하였고 1700년대 후반이 되면 인구가 폭증하고 경제가 엄청나게 성장합니다.
이 시기에 유럽인들이 와서 중국과 무역을 이어가지만, 일방적으로 중국의 물품이 유럽에 수입되고 유럽이 은으로 결제하는 형태였습니다. 이 시기에 중국의 경제력은 가히 세계 제일이었으며, 유럽은 변두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연구자들은 이런 상황이 유럽의 산업혁명 이전까지 이어졌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로 1600년대 세계의 중심은 아시아, 그중에서도 중국에 있었습니다. 역으로 이런 중국의 부유함은 유럽인들이 1800년대에 적극적으로 중국에 진출하기 시작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세계는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양상이 아직까지 확연이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다음 부분에서는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에 격변을 몰고 왔으며 오늘날 유럽 미국중심의 세계질서의 초석을 만든 3대 혁명을 중심으로 세계의 흐름을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