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유리 벽 너머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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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의 러시아는 세계가 목격한 가장 극적인 변환의 직후에 서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300년이 무너졌고, 임시정부마저 쓸려갔으며,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지 이제 막 4년이 지나 있었다. 내전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기근이 볼가 강 유역을 휩쓸고 있었으며, 레닌은 전시 공산주의의 실패를 인정하고 신경제정책으로 방향을 틀려 하고 있었다. 이 혼돈의 한가운데서 예브게니 자먀틴은 원고지를 앞에 놓고 앉아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 세계에서 혁명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완성되었고, 인류는 마침내 완벽한 질서에 도달했으며, 단 한 사람도 불행하지 않았다. 그 세계의 이름은 단일 국가였다. 그리고 그 완벽함이야말로 소설에서 가장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우리들(Мы)』은 디스토피아 문학의 시조로 불리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그 분류가 얼마나 단순화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 소설은 나쁜 사회에 대한 경고가 아니다. 그것은 좋음과 나쁨의 기준 자체가 어떻게 재편되는지에 대한 탐구다. 단일 국가는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벽하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한다. 그리고 그 증명 앞에서 독자는 반론을 준비하다가, 이상하게도 잠시 망설이게 된다. 자먀틴은 독자를 그 망설임의 자리에 데려다 놓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


자먀틴이라는 작가를 이해하려면 그가 단순한 문인이 아니었다는 사실부터 짚어야 한다. 그는 1884년 러시아 중부의 소도시 레베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러시아 정교회 사제였고 어머니는 피아노를 가르쳤다. 이 조합은 그의 이후 작품 세계를 예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엄격한 교리와 예술적 감수성, 그 두 세계의 긴장이 자먀틴의 사유에 내내 흐른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에서 조선공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실제로 선박 설계자로 일했다. 1916년 그는 영국 뉴캐슬에 파견되어 러시아 쇄빙선 건조를 감독했다. 그 시절 그가 바라본 영국의 산업 도시 풍경, 기계 문명의 정확성과 효율성,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리듬과 규율은 훗날 단일 국가의 건축적 상상력으로 직접 흘러들어 간다.


그러나 그는 공학자이기 이전에 혁명가였다. 대학 시절부터 볼셰비키에 가담했고, 1905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두 차례 체포되어 유배를 경험했다. 그 경험은 그에게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상이 어떻게 억압의 도구로 전화되는지를 뼈저리게 가르쳤다. 영국에서 돌아온 후 그는 『우리들』을 쓰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이 소설을 쓴 시기에 볼셰비키에 완전히 등을 돌린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혁명의 이상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부정한 것은 혁명이 굳어지는 방식, 즉 살아 있는 불꽃이 돌로 변하는 과정이었다. 『우리들』은 그 돌이 되어버린 혁명의 미래를 그린 소설이다.


소설의 구조는 일기 형식이다. 주인공 D-503은 단일 국가의 자랑이자 집약인 우주선 '인테그랄'의 수석 설계자다. 그는 인테그랄이 완성되면 그것이 우주 너머의 문명들에게 단일 국가의 완벽함을 전파하기를, 그들도 이 행복에 동참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일기를 쓴다. 우주 어딘가에 존재할지 모를 야만적인 지성체들에게 이 위대한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이 설정 자체가 이미 날카로운 풍자다. 우주를 향해 자신의 체제를 선전하려는 욕망은 소비에트 프로파간다의 우주적 버전이며, 동시에 모든 제국주의적 '문명화 사명'의 패러디다.


D-503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안다. 적어도 소설의 초반에는 그렇다. 그는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국가가 지정한 영양소를 섭취하고, 정확히 계산된 걸음걸이로 도시를 산책하며, 허가된 파트너와 커튼을 내린 시간 동안 성관계를 갖는다. 그 밖의 모든 시간에는 유리 벽이 투명하게 열려 있어 이웃이 그의 삶을 볼 수 있고, 그 역시 이웃의 삶을 본다. 그는 이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숨길 것이 없다는 것은 두려울 것이 없다는 뜻이며,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뜻이다. 자먀틴은 이 역설적 정의를 D-503의 입을 통해 아무런 비판 없이 제시한다. 독자가 스스로 그 역설을 느끼도록 만들기 위해.


단일 국가의 도시는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공간이다. 자먀틴은 이 도시를 묘사할 때 당시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 특히 구성주의 건축의 어휘를 의도적으로 불러온다. 알렉산드르 로드첸코나 엘 리시츠키 같은 예술가들이 꿈꾼 미래의 도시, 직선과 수직선이 지배하는 합리적 공간은 자먀틴에게 공포의 원천이었다. 아름다움이 효율성과 일치하는 세계, 예술이 국가의 목적에 복무하는 세계. 소설에서 단일 국가의 음악은 '음악 공장'에서 생산된다. 음표와 박자는 수학적으로 최적화되며, 그 음악은 작업 효율을 높이도록 설계된다. 쇼팽은 이미 오래전에 금지되었다. 쇼팽의 음악은 너무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감정은 비효율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시간은 '테일러화(Taylorization)'된다. 프레드릭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론, 즉 노동자의 모든 동작을 분석하고 최적화하여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이 이론은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레닌이 열렬히 지지했던 개념이다. 자먀틴은 이 테일러주의가 단지 공장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에 적용되었을 때 무엇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단일 국가에서 개인의 하루는 '시간표(Таблица часов)'에 의해 완전히 구조화되어 있다. 이 시간표는 자유의 박탈이 아니라 자유의 완성으로 제시된다. 혼돈스러운 선택으로부터의 해방.


D-503의 세계에 I-330이 등장하는 순간은 소설의 첫 번째 진짜 사건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수상하다. 그녀의 웃음은 계산되지 않았고, 그녀의 눈동자는 직각이 아닌 사선의 예각처럼 날카롭다. D-503은 그녀의 외모를 묘사할 때 처음으로 기하학적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를 느낀다. 그는 그것을 불편하다고 표현한다. 단일 국가의 시민에게 설명되지 않는 것은 오작동이며, 오작동은 고쳐져야 한다.


I-330은 D-503을 '고대 건물 보존 구역'으로 데려간다. 이 구역은 단일 국가 이전의 건물들이 박물관처럼 보존된 곳이다. 거기서 그녀는 서랍에서 고대의 옷을 꺼내 입고, 금지된 알코올을 마시며, D-503에게 쇼팽을 들려준다. 이 장면은 소설에서 가장 에로틱한 동시에 가장 반란적인 장면이다. 알코올의 금지는 단순한 건강 정책이 아니다. 그것은 의식을 변형시키는 모든 것, 즉 예측 불가능한 상태로 인간을 데려가는 모든 것에 대한 금지다. 쇼팽의 금지 역시 마찬가지다. 음악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 감정이 계산되지 않는 것, 그 계산 불가능성이 반란의 씨앗이 된다는 논리가 단일 국가에는 이미 각인되어 있다.


그 만남 이후 D-503의 일기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수식과 논리로 가득 차 있던 문장들 사이에 불규칙한 리듬이 끼어들고, 설명되지 않는 감각들이 침입한다. 그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집중이 흐트러지며, 인테그랄의 설계도 위에서 I-330의 얼굴을 그리다 지운다. 그는 이 상태가 무엇인지 모른다. 단일 국가에는 이 상태를 설명하는 언어가 없다. 국가 의사를 찾아가 증상을 설명하자 의사는 웃으며 말한다. "당신에게는 영혼이 생긴 것 같군요." 의사의 말투는 가볍지만, 그 진단이 내포하는 의미는 무겁다. 단일 국가에서 영혼은 질병의 이름이다. 그것은 R-13의 시처럼 국가의 목적에 종속될 수 없는 내면성, 예측되지 않고 통제되지 않는 자아의 발생을 의미한다.


자먀틴이 이 장면에서 던지는 질문은 심오하다. 영혼이란 무엇인가? 단일 국가의 논리에 따르면 영혼은 집단적 합리성에 저항하는 이기적 잔여물이다. 그것은 개인이 전체로부터 분리되는 계기이며, 따라서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먀틴에게 영혼은 정확히 그 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영혼을 갖는다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능력, 아름다움에 반응하는 능력, 그리고 계산으로 환원되지 않는 존재의 깊이를 갖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단일 국가에서 영혼의 제거는 구성원들이 진정으로 서로를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라는 이름 아래 모인 사람들은 실제로는 서로에게 완전히 무관심하다.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병렬로 작동하는 기계들의 집합이다.


D-503이 I-330에게 빠져들면서, 소설은 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정체성의 전쟁을 탁월한 문체로 재현한다. 그의 일기는 수학적 언어와 시적 혼돈 사이를 오가는 이중적 리듬을 갖는다. 한 문장에서 그는 감정을 미분 방정식으로 표현하려 하고, 다음 문장에서는 그 방정식이 부서지며 날것의 감각이 흘러나온다. "나는 왜 이것을 쓰는가?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 이것은 발작이다."


이 문체적 분열은 단순한 수사적 장치가 아니다. 자먀틴은 러시아 문학의 전통에서 도스토옙스키의 계보를 잇는 작가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실 인간처럼, D-503도 자신의 내면을 일기라는 형식으로 독자에게 직접 고백한다. 그러나 지하실 인간이 처음부터 자신의 소외를 인식하는 반면, D-503은 자신이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 그의 각성은 점진적이고, 고통스럽고, 불완전하다. 그는 반란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반란에 물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물듦은 그가 능동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누군가를 사랑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자먀틴이 이 소설에서 가장 정교하게 다루는 것 중 하나다. 단일 국가에서 사랑은 허용된다. 단지 그것이 성적 욕구의 합리적 해소라는 한도 내에서만. 파트너는 수학적 적합성에 따라 배분되며, 만남은 허가증을 발급받아 이루어진다. 이 시스템에서 질투는 없고, 집착도 없으며, 상실의 고통도 없다. 사랑이 관리될 때 그것은 안전하고 효율적이다. 그러나 D-503이 I-330에게 느끼는 것은 이 시스템 바깥에 있다. 그것은 허가받지 않았고, 예측되지 않았으며, 해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를 불행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살아있게 만든다. 이 역설 안에 소설 전체의 핵심이 있다.


자먀틴은 여기서 매우 위험한 주장을 한다. 고통이 삶의 조건이라는 것. 단지 위험한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라는 것. 완전한 행복은 완전한 무감각이며, 그 무감각 속에서 인간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 주장을 D-503의 각성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자먀틴은 독자에게 선택지를 제시한다. 당신은 D-503 수술 전의 고통스러운 삶을 원하는가, 아니면 수술 후의 평온한 죽음을 원하는가?


I-330이 속한 반란 조직 메페이(Мефи)의 이름은 메피스토펠레스에서 왔다. 파우스트에게 지식과 경험의 대가로 영혼을 요구하는 악마. 그러나 자먀틴은 이 이름을 아이러니하게 사용한다. 단일 국가의 관점에서 반란자들은 악마다. 그들은 인류가 힘겹게 이룩한 질서를 허물려는 파괴자들이다. 그러나 소설의 시선에서 메페이는 오히려 인류의 잃어버린 것들을 지키는 자들이다. 그들은 녹색 벽 너머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계획되지 않은 삶을 살고, 아이들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그들에게는 번호가 없다.


녹색 벽은 소설에서 가장 강력한 상징 중 하나다. 그것은 단일 국가와 자연을 가르는 경계다. 단일 국가 시민들은 이 벽 너머를 볼 수 없다. 볼 수 있을 때조차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교육받는다. 혼돈, 원시성, 야만. 그러나 D-503이 처음으로 녹색 벽에 가까이 갔을 때, 그는 그 너머에서 무언가를 본다. 나무들이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 그것은 계획되지 않았고, 수직도 수평도 아니며, 어떤 기하학적 원리도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 앞에서 D-503의 이성은 잠시 작동을 멈춘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반란의 계기가 된다는 이 생각은 자먀틴의 독특한 미학에서 나온다. 그는 소위 '네오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문학 운동과 관련이 있었으며, 상징주의와 사실주의 사이에서 언어 자체의 감각성을 중시했다. 자연은 그에게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성과 연결된 근거지였다. 단일 국가가 자연을 차단하는 것은 단순히 환경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동물성, 즉 계산되지 않는 욕구와 감각을 접촉하지 못하게 차단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자먀틴은 루소의 계보를 잇는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문명에 의해 타락되었다는 루소의 명제가 자먀틴에게서는 더욱 급진적인 형태로 등장한다. 문명이 최고조에 달할 때 인간은 가장 비인간적이 된다.


역사적 맥락은 이 소설의 예언적 차원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자먀틴이 소설을 쓰던 시기, 소련은 아직 형성 중이었다. 스탈린의 대숙청은 10년 이상 뒤의 일이었고, 굴라크는 아직 그 전모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자먀틴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혁명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1920년대 초 러시아 예술계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문화(Пролеткульт)' 운동이 맹위를 떨쳤다. 이 운동은 부르주아 예술을 폐기하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적 표현은 계급적 허위의식이며, 예술은 집단의 목적에 봉사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자먀틴은 이 논리가 단일 국가의 '음악 공장'과 다르지 않음을 직감했다.


그는 문학적 싸움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1923년 그는 에세이 「나는 두렵다(Я боюсь)」를 발표하여 소비에트 문학의 관료화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썼다. "나는 진정한 문학이 존재하지 않게 될까 봐 두렵다. 오직 관리되고 허가받고 지정된 문학만이 남게 될까 봐." 이 글은 그를 당국의 표적으로 만들었다. 작가 동맹에서의 압박이 시작되었고, 작품 출판이 막히기 시작했다. 그는 적들의 목록에 이름이 올랐다. 그러나 그는 계속 썼다. 1931년, 더 이상 러시아에서 작가로 살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직접 스탈린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자먀틴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망명을 구걸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소련 내에서 글을 쓸 수 없음을 명확하게 밝히며, 따라서 출국 허가를 요청했다. 비굴함도 없고, 반소비에트 선언도 없었다. 그는 스탈린에게 그의 작품들이 결국 소련에서도 인정받을 날이 올 것이라고 썼다. 놀랍게도 스탈린은 그 요청을 들어주었다. 막심 고리키의 중재 덕분이었다. 자먀틴은 1931년 파리로 떠났고, 1937년 그곳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가 예언한 것들이 소련에서 현실이 되어가는 것을 파리에서 바라보면서.


소련 당국이 이 소설의 출판을 금지한 것은 그들이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했다는 방증이다. 표면적으로 이 소설은 먼 미래의 이야기다. 볼셰비키 당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레닌이나 스탈린을 묘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함의는 너무 명확했다. 단일 국가의 '은인'은 절대적 권력을 가진 지도자다. 그는 선거로 선출되지만, 후보는 그뿐이다. 그가 독재자인지 아닌지의 질문은 의미가 없다. 그의 권력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가 없는 것이 그의 정당성의 증거로 제시된다. 이 논리는 소련의 정치적 수사와 너무 닮아있었다.


『우리들』의 최초 출판은 1924년 뉴욕에서 이루어졌다. 그레고리 질부르그(Gregory Zilboorg)가 번역한 영어판이었다. 러시아어 원문은 1927년 프라하에서 체코어 번역과 함께 처음 공개되었다. 소련 내에서의 출판은 1988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무려 67년의 금지. 그 사이 소설은 세계 각국에서 번역되었고, 디스토피아 문학의 원전으로 학계에서 논의되었으며, 동유럽의 반체제 지식인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읽혔다. 소련 당국은 자국민에게 그 소설을 읽히지 않기 위해 67년을 버텼다. 그리고 그 67년은, 소설이 맞추려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우리들』이 문학사에 남긴 가장 직접적인 흔적은 그것이 낳은 후손들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는 1932년 출판되었다. 헉슬리는 자신이 『우리들』을 읽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두 소설의 유사성을 완전히 부인하지도 않는 모호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두 소설을 나란히 놓으면 그 관계는 분명해진다. 인공 수정과 조건화(conditioning)로 인간을 계층화하는 세계국가, 소마(soma)라는 행복 약으로 불만을 잠재우는 체제, 자연 출산의 금지, 예술과 과학의 통제. 이 모든 것들은 단일 국가의 변형들이다.


그러나 헉슬리와 자먀틴의 근본적인 차이도 중요하다. 헉슬리의 디스토피아는 쾌락으로 통제된다. 시민들은 행복하다. 진짜로. 그들은 약물로, 성적 자유로, 오락으로 만족된다. 반면 자먀틴의 단일 국가는 쾌락보다 질서로 통제된다. D-503의 만족은 수학적 완전성에 대한 확신에서 온다. 이 차이는 두 가지 다른 형태의 권위주의에 대한 두 가지 다른 경고다. 하나는 소비문화가 반란 의지를 마비시킨다는 경고이고, 다른 하나는 합리성 자체가 억압의 논리가 될 수 있다는 경고다. 오늘의 세계에는 이 둘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조지 오웰과의 관계는 더 직접적이다. 오웰은 1944년 『우리들』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읽고 Tribune에 리뷰를 썼다. 그 리뷰에서 오웰은 이 소설이 『멋진 신세계』보다 우월하다고 평가하며, "더 어둡고 더 설득력 있는 악의 비전"을 담고 있다고 썼다. 그리고 5년 후 『1984』가 출판되었다. 두 소설의 유사성은 우연이 아니다. 빅 브라더는 은인의 직계 후손이다. 텔레스크린은 유리 벽의 기술적 버전이다. 사상경찰(Thought Police)은 단일 국가의 '보호자(Стражи)'와 같은 기능을 한다. 오웰이 『우리들』에서 가져온 가장 중요한 개념은 아마도 언어와 사유의 관계일 것이다. 뉴스피크(Newspeak)는 단어를 없애 사유의 가능성을 제거한다. 단일 국가 역시 특정 개념들이 존재하지 않는 언어 체계를 유지한다. 사랑, 자유, 혼돈 같은 단어들은 부정적 의미로만 정의된다.


그러나 자먀틴, 헉슬리, 오웰이라는 세 작가를 하나의 계보로만 묶는 것은 자먀틴의 독창성을 과소평가하는 일이다. 『1984』의 윈스턴 스미스는 처음부터 체제에 저항한다. 그는 반란자로 태어난 인물이다. 『멋진 신세계』의 버나드 마르크스 역시 자신의 불만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D-503은 다르다. 그는 체제의 진정한 신봉자로 시작한다. 그의 반란은 의도된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촉발된 것이다. 이 출발점의 차이가 자먀틴의 질문을 더 보편적으로 만든다. 반란자를 억압하는 것은 예측 가능한 전체주의의 모습이다. 그러나 행복한 순응자가 어떻게 각성에 이르는가, 그리고 그 각성이 어떻게 다시 지워지는가. 이것은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이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자먀틴은 마지막 카드를 꺼낸다. 단일 국가는 '상상력 수술(Операция)'을 전 시민에게 시행할 것을 발표한다. 수술의 원리는 간단하다. 인간의 뇌에서 상상력을 생성하는 부위를 외과적으로 제거한다. 수술 후 인간은 완전히 합리적인 존재가 된다. 감정은 최소화되고, 충동은 사라지며, 반란의 가능성은 물리적으로 차단된다. 은인은 이 수술을 혁명의 완성이라고 선언한다.


1921년 자먀틴이 이 수술을 상상했을 때, 그것은 SF의 영역에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장면을 읽는 독자는 다른 감각으로 반응한다. 20세기 중반 소련과 서구 모두에서 실제로 시행된 전두엽 절제술(lobotomy)을 알고 있는 독자, 향정신성 약물이 대규모로 사용된 역사를 아는 독자, 그리고 오늘날 알고리즘이 인간의 주의와 욕구를 미시적으로 조율하는 방식을 경험하는 독자에게 자먀틴의 상상력 수술은 더 이상 순수한 은유가 아니다.


특히 도파민 체계를 이용하는 소셜 미디어 설계와 이 수술의 유사성은 섬뜩하다. 수술이 상상력을 제거하는 물리적 방법이라면, 알림과 추천 알고리즘은 상상력이 펼쳐지기 전에 다른 자극으로 대체하는 연속적 방법이다. 목적은 같다. 계획되지 않은 사유, 현재 상태에 의문을 품는 생각, 다른 삶을 상상하는 능력. 그것들을 차단한다. 자먀틴은 이 기제가 총칼이나 강압이 아니라 편의와 쾌락의 형태로 올 수 있다는 것을 헉슬리와 함께, 그러나 헉슬리보다 먼저 예감했다.


D-503은 결국 수술을 받는다. 이것이 소설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다. 그는 강제로 끌려간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이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영혼이라는 병에서 치료받아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수술을 받는다. 체제가 그에게 가한 가장 깊은 억압은 수술이 아니라 수술을 원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수술 후 D-503은 이전의 자신을 기억하지만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I-330을 보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그녀가 고문받는 것을 보면서도 얼굴 근육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단일 국가의 완벽한 시민이 되었다. 아무것도 없어진 자리에.


그러나 소설은 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 일기 항목에서 D-503은 녹색 벽의 일부가 폭파되었다고 쓴다. 메페이의 반란이 성공한 것이다. 야만인들이 도시 안으로 밀려들고 있다. D-503은 이 소식을 담담하게 쓴다. 그에게는 이제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독자에게는 그것이 중요하다. 폭발이 있다. 균열이 있다. 완벽한 벽에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그 구멍을 통해 바람이, 빗소리가, 계획되지 않은 삶이 흘러들어 온다. D-503은 느끼지 못한다. 독자는 느낀다. 그것이 자먀틴의 마지막 계획이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잃어버린 감각을 독자에게 되돌려 주는 것.


『우리들』을 단순히 소련 비판의 텍스트로 읽는 것은 이 소설의 가장 날카로운 날을 무디게 하는 일이다. 자먀틴 자신이 이 소설을 특정 체제에 대한 공격으로 제한하지 않으려 했다는 증거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는 1923년의 에세이에서 진정한 이단자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그 이단자가 소비에트 러시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에서든 필요하다고 썼다. 안정성이 미덕이 되는 순간, 그 사회는 죽기 시작한다고.


이 통찰은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사는 독자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된다. 우리는 감시 카메라로 지켜보는 권위주의 국가에서 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서비스에 데이터를 제공하며, 그 데이터는 우리의 취향과 행동을 예측하고 유도하는 데 사용된다. 우리는 번호로 불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용자 ID로, 추천 알고리즘의 클러스터로, 광고 타깃의 세그먼트로 분류된다. 우리는 허가증 없이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은 플랫폼의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되고, 이별의 패턴은 다음 광고의 소재가 된다.


자먀틴이 그린 단일 국가와 오늘의 세계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강제의 유무가 아니라 동의의 성격이다. 단일 국가의 시민들은 체제에 동의한다. D-503처럼, 그들은 그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동의한다. 오늘날의 우리도 동의한다. 단지 우리는 그것이 편리하기 때문에 동의한다. 자먀틴은 이 편의에 의한 동의가 두려움에 의한 복종보다 더 완전한 항복일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편의에 항복한 자는 자신이 항복했다는 것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정보의 자발적 제공이라는 현상을 소설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유리 벽은 누가 설치한 것이 아니다. 시민들이 스스로 유리를 선택했다. 투명함이 더 편하기 때문에, 혹은 투명함의 대가로 더 나은 서비스를 받기 때문에. D-503이 유리 벽을 사랑했던 이유와 정확히 같다. 그 유리를 통해 그는 이웃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며, 따라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그 안도감이 유리를 견고하게 만든다.


자먀틴은 혁명적 에너지가 영원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에세이 「나는 두렵다」에서, 그리고 그보다 앞선 1920년의 에세이 「나는 두렵다, 그러나 나는 쓴다」에서 그는 반복적으로 이 테제를 전개한다. 혁명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어야 한다. 모든 혁명이 달성되는 순간, 그것은 새로운 체제가 되고, 새로운 체제는 새로운 혁명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무정부주의적 허무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 자체의 논리다. 살아있는 것은 항상 변화하고, 변화를 멈춘 것은 죽은 것이다.


단일 국가의 근본적인 오류는 이것이다. 그것은 최종적 해결에 도달했다고 믿는다. 인류의 문제가 풀렸다고, 더 이상의 발전이 필요 없다고, 역사가 끝났다고. 이 믿음은 모든 전체주의 체제의 공통된 형이상학이다. 공산주의의 최종 단계로서의 사회주의, 천년왕국의 실현, 역사의 종말. 자먀틴에게 이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음의 선언이다. 역사가 끝났다는 믿음은 생명이 끝났다는 믿음이다.


D-503의 수술 역시 이 논리의 체내적 실현이다. 상상력의 제거는 미래를 제거하는 것이다. 상상하는 능력이란 현재와 다른 상태를 가정하는 능력이며, 그것은 곧 지금의 세계가 유일한 가능성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의 씨앗이다. 상상력이 없는 인간은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하는 생명체다. 그것은 단일 국가의 영원한 현재, 변화 없는 행복의 완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먀틴에게 삶이 아니라 정지된 죽음의 상태다.


예브게니 자먀틴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그는 디스토피아 장르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충분한 말은 아니다. 그는 또한 러시아 아방가르드 문학의 중요한 일원이었고, 공학자이자 혁명가였으며, 망명 지식인의 전형적 비극을 산 인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사회가 그에게 부여한 모든 역할과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언어로 쓴 작가였다.


『우리들』은 그 언어의 결정체다. 그것은 특정 시대의 경고가 아니라 시간을 가로질러 반복되는 유혹에 대한 경고다. 안전의 이름으로 자유를 포기하라는 유혹, 효율의 이름으로 감정을 억누르라는 유혹, 행복의 이름으로 의미를 거래하라는 유혹. 이 유혹은 강압의 형태로도 오고, 편의의 형태로도 오며, 때로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올라오기도 한다.


D-503은 유리 벽 앞에 서서 그 너머를 처음으로 바라보는 순간 눈물을 흘렸다. 그는 왜 우는지 몰랐다. 그 모름이 그의 각성의 시작이었다. 설명되지 않는 것 앞에서 멈추는 능력, 계산되지 않는 감동을 느끼는 능력, 그리고 그 감동의 이유를 즉시 알지 못하면서도 그것에 머무는 능력. 자먀틴은 그것을 인간성의 핵심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이 위협받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유리 벽을 썼다.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이미지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We_(no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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