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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Trolls <Let It Be Me>

by 천경득

"당신의 인생곡은 무엇인가?"


‘인생의 곡’이란 무엇인가요라는 식으로 질문으로 답하지 않아도 되므로, 내게는 좋은 질문이다.

나는 누군가 느닷없이 물어도 답할 인생곡이 5곡이나 있다.


나에게 나쁜 질문이란 어떤 것인가. 한 번 짚고 가고 싶다.

“천 변호사, 이 소송 어때? 이길 거 같아, 질 거 같아?”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아니, 그건 그 사건을 맡긴 변호사한테 물어야지, 사건을 맡기지도 않은 나한테 왜 물어?’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 격이지만, 이것은 내 글쓰기의 일 전략이다.


‘인생의 곡’이란 길을 가다 그 멜로디를 들으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곡이다.


그 멜로디를 들으면 자동으로 그 또는 그녀가, 그 또는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과 공간이 함께 딸려오는 그런 곡이다.


영화 <<첨밀밀>>의 마지막 장면.

한 가게에서 가수 등려군의 사망 소식과 함께 그녀가 부르는 <첨밀밀>이 흘러나오자, 길을 가던 여명과 장만옥이 각자 가게 앞에 멈추어 윈도 안의 텔레비전을 응시한다.

그리곤 서로를 발견하고, 활짝 웃는다.




나의 인생곡 리스트


1. 최불암과 정여진이라는 아이(지금은 아마 50대 후반)가 함께 부르는 <아빠의 말씀>


앤서니 퀸이 찰리라는 꼬맹이랑 부른 <Life itself will let you know>를 번안한 곡이다.


중학생일 때 나는 마당에 개방되어 있는 툇마루를 가진 작은 슬래브 지붕의 목조 주택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대문과 지붕이 낡은 파란색 집이었다.


나는 그 툇마루에 누워 아버지와 함께 그 곡을 들으면서 LP판 뒷 커버의 글자들을 살피고 있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고, 아버지는 흰색 러닝셔츠를 입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앨범의 모든 노래가 끝나면 나는 작은 방에 들어가서 수학이나 과학 문제를 풀었다. 영어 공부를 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이었다.


1992년 겨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전날 나는 코와 입에 호스를 잔뜩 꽂고 응급실 베드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만났다. 너무 괴로워, 눈으로 호스를 빼 달라 사정하고 있었다.


“아빠, 이거 빼면 우리 이제 영원히 못 만나요. 그래도 빼 줘요?”


내 말을 알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아버지는 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는 물려받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물려줄 것이 없었다. 세 아들은 아직 어렸고, 평생 주부였던 어머니는 경제적 능력이 없었다.


그런 가족을 남기고 가야 하는 한 가장이 임종 직전 마주했던, 포기하고 싶은 지극한 육체의 고통과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는, 한없는 걱정의 마음을 떠올리면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이제 그때 그 아버지의 나이보다 내 나이가 더 많아졌다.


당시에는 핸드폰 같은 연락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열흘 후에 나는 학력고사를 쳤고, 요행으로 대학에 합격했다.


나는 <아빠의 말씀>을 애써 찾아 듣지는 않는다.


2. F.R. David의 <Words>


그 당시 툇마루에서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곡이다.


아버지가 <황성옛터> 같은 곡을 혼자 부르며 녹음한 카세트테이프가 있었는데, 여러 번 이사를 하면서 이제는 찾을 수가 없다.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3. NewTrolls의 <Let It Be Me>


<Let It Be Me>는 1964년 미국 가수 에버렛과 제리 버틀러가 처음 부른 곡인데, 이후 많은 가수들이 불렀다.


1996년 복학해서, 어떤 계기였는지는 모르겠는데, 뉴트롤스, 카멜(담배 아님) 같은 아트록(?)에 잠시 빠져 있었다.


지금도 최애 앨범을 꼽으라면, <Adagio>, <Let It Be Me> 등이 수록된 뉴트롤스의 <<Concerto Grosso per 1, 2 New Trolls>>와 <Long Goodbye>가 수록된 카멜의 <<Stationary Traveller>를 든다.


대학 내내 딱 한 사람과 연애를 했는데, 내 연애는 사연이 많았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전에 연애는 끝이 났었다.


사법연수원 입소 후 어떤 바에서 우연히 한 번 만나진 일이 있을 뿐,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사이 두어 번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만나 지지 않았다.


연애가 시작되기 전에 그녀에게 뉴트롤스의 <<Concerto Grosso per 1, 2 New Trolls>>와 로스트로포비치가 연주하는 바흐의 무반주첼로곡 CD앨범을 선물했었다.


4. Be the Voice의 <Altogether Alone>


일본 그룹의 노래다. 앨범을 선물했었는데,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상상일 수도 있겠다. 사실은 잃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5. Sia의 <Snowman>


진심으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여전히 자주 듣고 있습니다.


사족.

20여 년 전 사법연수원 다닐 때다. 뜬금없이 전화를 해, 200만 원인지, 300만 원인지 가물가물한 액수의 돈을 빌려 달라고 했었다. 시험에 합격하면 갚겠다고 했다.


정지조건부 법률행위이고, 조건이 불성취되었으므로 안 갚아도 되는 것인가. NewTrolls의 <Let It Be Me>를 들을 때마다 이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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