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운동에는 소질이 없었다. 비쩍 말라서 체격도 작았고, 체력도 약했다.
소질이 없어 잘하지 못했고, 잘 못했으므로 좋아하지 않았다.
쉰 살이 넘은 지금도 이따금 하는 운동이란 숨쉬기와 걷는 것뿐이다.
2016년 4월에 나는 고양시 일산동구에서 법률사무소를 하고 있었다.
제목이 ‘전망’ 합동법률사무소였다.
사무실이 10층짜리 건물 9층에 있었는데, 내 자리 뒤로 통창이 있어 ‘전망’이 괜찮았고, 우리의 ‘전망’이 밝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었다.(기대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층당 면적이 700평 정도인 일산에서는 꽤 큰 건물이었다. 건물 이름은 ‘센트럴프라자’.
2016년 4월 9일, 토요일이었다.
전날 늦은 음주로 일어났더니 숙취로 머리가 깨지는 것 같았다.
집에서 뒹굴거릴 수가 없어서, 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사무실엘 갔다.
당연히 어두컴컴하고, 아무도 없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토요일의 수상한 방문자를 막기 위해 사무실 출입문을 잠그고, 불을 켜지 않는다.
내 방으로 들어가서 소파에 편안하게 누웠다.
잠잘 때 듣는, 백건우가 연주하는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를 틀어놓고 잠을 청했다.
느리고 비통한, 느리고 슬픈, 느리고 장중한 수면곡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숙취로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눈길이 천정으로 갔다.
천정에 박힌 인테리어용 꼬마전구에서 희미한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누전인 것 같았다.
입에서 욕이 먼저 나왔다. 아오 CB, 하필이면 오늘.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숙취가 심했다.
전구를 빼기 위해 의자(하필이면 바퀴가 달린 의자였다) 위에 올라섰지만, 닿지 않았다.
딱히 도움이 될 물건이 없었다.
생각 끝에 그냥 깨 버리자.
빗자루로 툭툭 쳤지만 쉽게 깨지지 않았고, 의자가 흔들려서 오히려 내가 깨질 판이었다.
119에 전화를 했다.
“여기, 일산동구에 있는 센트럴프라자인데, 천정에 있는 인테리어용 꼬마전구가 누전이 되었어요. 연기가 나는데, 뺄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해요?”
“거기 어디세요? 거기 어디세요? 빨리 나오세요.”
내 물음에는 답을 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멀리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불이 났나 보다.
“아니, 거기 아니고요. 누전이 되어서 연기가 난다니까요.”
계속 나오라는 소리만 해대고 있었다. 짜증이 났다.
숙취로 내 발음이 꽐라 상태인가?
필라멘트가 다 타버렸는지 더 이상 연기가 나지 않았다.
전화를 끊어버리고, 다시 소파에 누웠다.
그 와중에 잠이 싹 달아나 버렸다.
툴툴거리면서 일어나, 그냥 일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책상에 앉았다.
그때 나는 고양시 덕양구에 출마한 정 oo 국회의원 후보의 선거운동을 돕고 있었다.
노트북을 켜고, 몇 개의 선거운동용 메시지를 썼다.
한참을 쓰고, 허리가 아파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어라??
무릎까지 온 사무실이 연기로 가득했다.
너무 집중해서 일을 하다 보니 아래를 쳐다볼 틈이 없었다.
이게 뭐지, 하면서 내 방을 나가 컴컴한 직원들 근무공간을 지나 사무실 출입문을 열었다.
복도가 온통 물바다고, 열 명도 넘는 소방관들이 복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를 본 한 소방관이,
“여기 사람이 있었네. 문이 잠기고, 불이 꺼져 있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요. 빨리 계단으로 대피하세요. 불났어요.”
소방관이 나를 끌었다.
하지만 소방관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서, 노트북과 핸드폰을 챙겼다.
나는 그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했던 것이다.
계단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더니, 물이 폭포처럼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앗, *대따.
나는 운동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9층에서 1층까지 거의 1초 만에 달려 내려갔다. 순식간, 아니 빛의 속도였다.
거침이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은 나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 빠져나간 상태였다.)
밖에는 이미 접근금지 노란 선이 건물을 두르고 있었고, 층 전체가 하나의 뷔페 식당이었던 10층이 불타고 있었다.
소방차들이 시뻘건 불길을 잡기 위해 쉴 새 없이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선 밖에서 사람들이 불구경을 하고 있었다.
파란 선거운동복을 입은 유 oo 의원이 걱정스럽게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인사를 하자,
“천변, 저기 9층 당신 방 블라인드 보인다.”
내게 그런 뜀박질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일찍 알았다면, 나는 어쩌면 변호사가 안 되었을지도 모른다.
단언컨대 그때 나는 우사인 볼트보다 빨랐다.
지금은 소질이나 재능 같은 것은 없다고 믿는다.
때 되면, 다 하게 된다.
그 뒤로 아무리 잠이 안 와도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를 수면곡으로 듣지는 않게 되었다.
PS.
1. 그때, 불나면 액땜하는 거야, 다른 일들이 잘 될 거야,라고 위로해 주었던 이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일주일 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 oo 후보는 당선되었다.
2. 소방관들의 빠른 대처로 9층까지 불이 번지지는 않았지만, 9층 사무실은 물폭탄을 맞아서 인테리어를 새로 해야 했다. 물론 소송서류나 책 같은 종이류는 다 버려야 했고, 전기로 작동하는 집기는 다 고장 났다. 빗자루 같은 거는 말려서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