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에는 방과 후 영어 수업이 없다. 예비 중학생인 희재를 위해 매일 집에서 영어 공부를 함께 하기로 했다.
“희재야, 영어 한 장을 읽으면 텔레비전 30분 보여줄게.”
“좋아요.”
영어 공부를 유독 싫어하는 희재를 위한 처방이었다.
시작은 보상을 걸고 했지만, 열흘이 넘도록 희재는 잘 따라와 주고 재미있어서 했다.
영어책은 현재는 품절이 된 영어 위인동화집이고 100장이 수록되어 있다. 한 챕터가 20줄 정도의 단문이어서 희재가 공부한다는 생각 없이 읽기 좋다.
오늘 아침에도 희재가 책을 꺼내 내게 온다.
“엄마 영어 공부하자요.”
“희재야, 이제 네가 공부를 다 마치고 내게 검사만 받자. 엄마도 힘들어.”
스스로 공부하지 않고 자꾸 내게 의존하는 것 같아 한마디 했지만, 희재는 싫다고 버틴다. 나는 내심 희재와 함께 공부하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겠지 라는 생각에 그냥 두기로 했다. 희재는 공부를 한다기보다 나와 놀면서 영어를 배운다는 생각으로 애써 부담을 갖지 않으려는 듯했다. 공부한다고 하면 피곤하니까.
“자, 읽어봐.”
희재가 내 옆에 앉아 책을 읽으려는 사이, 종민이가 따라오며 형 앞에 선다.
“엄마, 나도 할래요.”
“그래, 종민이는 쉬운 책 한 권 가져오너라.”
종민이는 자신도 책 한 권을 읽으면 티브이 30분을 볼 요량으로 히죽이며 아이 방으로 가서 짧은 영어 책 한 권을 가져온다.
희재가 책을 읽는 동안 종민이는 책을 가져와 맞은편에서 크게 읽는다.
“아이고, 종민아. 종민이는 아빠에게 봐달라고 해.”
희재와 종민이의 목소리가 섞여 당최 무슨 말인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예”
종민이는 책을 들고 쫄래쫄래 아빠방에 서 있는다. 그러더니 남편 반응이 시원찮은지 책을 두 손으로 들고 내 앞에 선다.
“엄마가 해주세요.”
“종민아, 지금 형이 책을 읽고 있어. 아빠한테 해 달라고 하자.”
나는 남편을 불렀다.
종민이는 책을 들고 거실 바닥에 앉아 책을 펼친다.
남편은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로 가더니 종민이를 쓰윽 쳐다본다.
“읽어!”
종민이는 자신이 영어 원문 동화를 가져왔지만, 잘 읽어내지 못한다.
“위레.”
“못 읽네. 다시 읽어!”
종민이는 엉거주춤한 표정으로 펼쳐놓은 페이지를 떠듬떠듬 읽는다.
“웨어 도 이우 펠?”
“필!”
나는 굳어지는 종민이의 얼굴을 보니 너무 웃음이 났다. 남편은 거실에 서서 바닥에 책을 펼쳐 더듬더듬 읽고 있는 종민이를 내려보고만 있다.
“두라고 두!”
왜 좀 더 다정하게 차근차근 앉아서 가르쳐주질 못할까.
처음에는 그런 남편이 야속하고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몇 년을 함께 보낸 후 나는 남편과 아들의 생존방식이라고 인정하기로 했다.
남편은 아이들과 평소에 잘 놀아주지만, 항상 경계가 있고 상하관계를 정확히 하려고 한다. 그리고 호시탐탐 아들이 자신의 자리를 노린다고 경계심을 풀지 않는다. 물론, 아이들 역시 틈만 나면 아빠 침대자리에 눕거나, 아빠 흉내를 낸다거나 아빠를 약 올리기 일쑤다.
그런 남편과 아들과의 관계를 나는 이해할 수 없으므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종민이는 겨우 한쪽을 다 읽고 와서 내게 다 읽었으니 티브이를 보여달라고 조른다.
“종민아, 엄마는 종민이가 지금보다 더 잘한다고 알고 있는데, 겨우 한쪽을 읽었네.”
“다 했다고.”
나는 안 되겠어서 방과 후 영어 교재를 가져오라고 했다. 종민이는 책가방을 열어 영어 레벨 3 교재를 가져온다. 종민이가 열심히 공부한 흔적이 가득했다.
“엄청 열심히 공부했구나. 종민이는 그동안 공부했던 내용들을 복습하는 것으로 하자.”
종민이는 공부할 분량이 늘었지만, 새로운 페이지를 추가하지 않아 다행한 표정이다. 공부를 했어도 다시 잊어버리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늘 보고 또 보아야 익숙해지는 것이겠지.
종민이도 다시 읽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열심히 읽는다.
“잘했어! 가서 티브이 보거라.”
“예~”
희재는 자신의 영어 책을 덮는다. 희재는 뭔가 효율을 따지려는 듯하다.
“30분 영어공부하고 30분 티브이 보네.”
희재와 종민이는 오늘 오전에도 안방에서 뒹굴거리며 티브이를 본다.
30분 후,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 둘을 집에서 쫓아내듯 눈 덮인 뒷산에 데려간다. 종민이의 손에는 눈썰매가 들려있다. 저 멀리 아파트 베란다 밖으로 씩씩한 종민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