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되면 우리 집에도 작은 발소리와 따뜻한 숨소리가 깃들겠지
재수생 시절, 집에 털복숭이 막내가 들어왔었다. 생후 한 달이 지난 작고 하얀 푸들. 주로 어머니가 돌보셨고, 나는 그저 장난치고 놀아주는 역할에 만족했다. 밥을 주고, 산책하고, 수의사에게 데려가는 일들은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다.
세월이 흘러 막내가 말년을 맞았을 때, 생명을 돌본다는 것의 무게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점점 쇠약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밤낮으로 수발을 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도 마음이 아팠다. 따뜻한 심장이 뛰는 생명을 키운다는 것은 결국 가슴 아픈 이별까지 감내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일까. 결혼 후 아내와 아이가 "강아지 키우자"라며 눈을 반짝일 때마다 나는 애써 딴청을 피웠다. 아이는 틈만 나면 애견 카페에 가자고 조르고, 아내는 때때로 강아지와 함께하는 삶이 자신의 꿈이라며 대놓고 어필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이별의 무게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언제부턴가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다. 간절한 눈빛을 더 이상 모르는 체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일이라면 응당 협조해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문을 열기로 했다. 어린 시절처럼 장난만 치는 구경꾼이 아니라, 진짜 가족의 일원으로 맞을 각오로. 아직 아이에게는 비밀이다. 부디 건강하게 오래 함께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준비할 예정이다.
때가 되면 우리 집에도 작은 발소리와 따뜻한 숨소리가 깃들겠지. 그날이 두근두근 기다려진다.
사진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