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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일 아니니 대충 해 와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by 이열

“내가 이 팀장한테 뭐라고 하는 건 아닌데…”

‘… 뭐라고 하시는 것 맞잖아요.’


직장 상사의 탐탁지 않은 목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며칠 전 들었던 그의 지시가 바로 떠올랐어요.

“중요한 일 아니니까 적당히 만들어서 보고해 줘요.”


프로젝트가 여러 개 돌고 있을 때라 무척 바빴고, 말 그대로 딱히 중요한 일은 아니겠다 싶어 정말 ‘적당히’ 준비했지요. 하지만 결과는 나에게 실망한 표정과 짜증 섞인 반응.

너무 하십니다. 흑.

결국 그날, 자료를 다시 준비하느라 팀원과 함께 야근을 했어요.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닙니다.

전 회사에서 다른 부서 임원분이 아래 직원을 통해 자료를 요청한 적이 있었어요. 목적과 범위를 물었더니, 별 거 아니니 그냥 있는 자료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있는 자료 살짝 편집해서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직원이, 요청하신 분이 이 자료로 어떻게 판단하냐고 성을 내셨다고 전해주데요? 만약 자기였다면 추가 정보 더 확인·보완해서 올렸을 거라는 겁니다.


… 네가 그냥 가볍게 올리면 된댔잖아, 이 녀석아. 흑흑.


그땐 이해하지 못했지만, 경력이 쌓이면서 윗 분들이 왜 그렇게 반응하는지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상사가 말하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는 표현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절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면 굳이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겠죠. 보고를 지시했다는 건 그가 알고 싶은 정보가 있거나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있다는 뜻이니까요.


문제는 윗사람들이 종종 ‘개떡같이 말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인데요. 자신이 기대하는 최소한의 수준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막연히 지시하는 거죠. “바쁘지? 대충 만들어 와”라며 미안한 척 쿨한 척하다가, 정작 자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반응하곤 합니다.


그가 말하는 ‘대충‘과 우리가 생각하는 ‘대충’은 이승과 저승 사이의 간극만큼이나…


이런 지시를 받았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방심하지 않는 거예요.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대충 해 와”라는 말을 내 식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한 상황이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왜 이 보고를 지시했는지, 상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그리고 이 자료를 통해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 반드시 예상해 보아야 합니다. 상상해 봅시다. 상사에게 빙의해서 상사의 눈으로 지금 상황을 판단해 보는 거예요. 지금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상사의 윗 분은 상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지. (하, 어렵)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답은 명확합니다. 만약 내가 후배에게 “적당히 해 와”라고 부탁했는데, 정말 성의 없이 해 왔다면 실망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물론 먼저 설명을 제대로 했어야 하지만요.)




사실, 상사의 이런 지시는 내 평판을 다듬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상사의 말과는 달리, 정성을 다해 자료를 준비하면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거든요. 사람은 기대하지 않았던 큰 선물을 받을 때, 심리적으로 빚을 진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정성껏 준비한 보고서는 상사의 눈에 신뢰와 고마움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커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는 한 번의 극적인 순간이 상사의 마음속에 나를 새롭게 각인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잘해야 하는 업무로는 상사를 감동시키기 어렵습니다.)


정성을 다해 자료를 만들어 보고했을 때, 윗사람이 "덕분에 잘 정리됐어."라고 말해준다면 어떨까요? 그 순간, 상사의 신뢰와 존중을 얻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겁니다.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는 태도가 몸에 배면, 어느덧 그가, 저를 필요할 때마다 떠올리고, 중요한 일 앞에선 가장 먼저 제 이름을 부르게 될 겁니다. (이건 이것대로 별로지만…)


작은 열의가 만든 단 하나의 보고서가, 앞으로의 관계와 기회를 바꾸는 시작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음에 “대충 해 와”라는 지시를 받는다면 그 타이밍을 기회로 만들어 보세요. 쌓인 신용은 복리로 불어나 당신을 돋보이게 할 테니까요.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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