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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의 딜레마

직장은 때때로 나를 제압했고, 때로는 나를 지탱하는 모순적인 존재였습니다

by 이열

그날, 사무실 공기에 서늘한 한기가 감돌았습니다. 대회의실 문 너머 전해진 구조조정 발표 소식이, 찬바람이 되어 우리를 할퀴고 지나갔어요. 평소 농담을 주고받던 동료들마저 아무 말 없이 모니터만 바라보았죠. 제가 사무실에 들고 온 커피에서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았습니다. ‘회사에선 누구도 안전하지 않구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요,.

어느 순간 저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고 있을까?"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손에 쥔 월급은 저에게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쁨을 주었어요. 부모님께 처음 용돈을 드리던 날, 어머니 눈시울이 벌게지던 모습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환희는 잠시였어요. 점점 늘어나는 업무가 과중한 압박으로 다가왔던 거죠. 야근은 물론이고, 주말 출근도 예사가 됐습니다. 회계 부서의 업무는 1년 365일 반복됐습니다.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을 보며 느꼈던 부담감과 쳇바퀴 돌 듯 돌아오는 마감 일정이 저의 시간과 정신을 조금씩 옭아매기 시작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친구들과 자전거 라이딩을 했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은 한여름 소나기를 뚫고 아라뱃길 자전거 도로를 달렸던 때예요. 목적지에 도착 후 땀과 빗물이 뒤섞인 몸으로 함께 나눠 마신 막걸리 한 잔. 그날의 시원 달달한 막걸리 맛이 지금도 입 안에서 맴도는 듯합니다. 하지만 입사 후 시간이 흐르며, 그런 추억들과 서서히 작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규칙한 주말 출근 때문에 시간을 온전히 확보할 수 없었던 저는 결국 더 이상 모임에 나가지 않았어요. ‘다음엔 더 멀리 가보자’고 했던 약속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습니다.




제가 회사를 선택했을 때, 회사도 저를 선택했습니다. 처음엔 그 선택이 거래처럼 느껴졌어요. 안정된 소득과 내 재능을 교환하는 공정한 계약처럼 보였죠. 하지만 몇 년이 지나고 보니 거래의 대가가 너무 컸습니다. ‘월급과 맞바꾼 내 시간이 너무 낮게 평가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몇 해 동안, 가고 싶었던 여행은 꿈속에서나 가능했습니다. 사진을 배우고 싶어 장만했던 DSLR은 책장 위에 놓인 채 먼지만 쌓였고요. 주말을 만끽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책하는 여유는 결국 남의 이야기가 되었지요.


그러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은 새로운 가능성 위로 올라설 디딤돌이 됩니다. 회계 부서에서 익힌 분석력은 저를 기획·관리 부서로 이끌었습니다. 그곳에서 쌓은 사업적 감각과 틈틈이 준비했던 영어 스킬은 해외영업직으로의 이직이라는 길을 열어 주었고요. 퇴사 후 동료들의 축하 속에서 느꼈던 해방감은 단순한 성공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제야 깨달았어요. "나를 매몰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준비할 때만, 다른 기회는 열린다.”


직장은 제게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안정된 소득, 성장을 위한 기회, 그리고 사회적 인정. 하지만 그것은 불안과 시간이라는 대가와 함께였어요. 직장은 때때로 나를 제압했고, 때로는 나를 지탱하는 모순적인 존재였습니다. 이런 모순 속에서 균형을 찾는 것은 여전히 진행 중인 과제예요.


저는 다시 DSLR을 꺼냈습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 사진을 찍으며 소소한 기쁨을 누리는 중이에요. 주말에는 한강을 달리며 바람의 냄새를 느끼고요.

살면서 저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지 항상 고민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어요. 저에겐,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지킬지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가끔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됩니다.




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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