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그때의 제가 대견합니다
오전 대표이사 주간 미팅,
대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 미리 앉아 있는 임원, 간부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습니다.
“이열 님, 이거 의미 있을까요?”
“되는 방향으로 시작하고 관리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득이 될 것 같아요.”
대표 지시로 준비한 그날 보고에 나름 자신이 있었어요.
다른 산업에서 넘어온 대표는 우리 업에도 금융 자본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길 바랐습니다.
리스크를 함께 안고, 과실도 나눠 갖는 상생의 그림.
회사 기성 인력들도 예전부터 몇 차례 고민했던 바이나 메리트가 별로 없다고 묻어둔 구상이었어요.
하지만 신임 수장이 야심 차게 칠하고 싶은 그림이 있다면, 가능한 작품이 나오게 스케치를 해드리는 것이 스탭의 도리.
조사와 회의, 부서 협의 끝에 가설 및 논리를 논의 자료 형태로 만들어 참석자 간 의견을 교환하고, 결정은 대표가 할 수 있도록 밑그림을 완성했습니다.
“그러니까 펀드를 이렇게 저렇게 끌어오면…”
“이게 뭐야? 뭐, 이, 이런 걸 만들었어?”
“네?”
“이걸 얘네한테 왜 주냐고? 아오, 하아, 내가 참자. 참아.”
“아, 일단 수익률을 관리하면서…”
“어, 계속 얘기해 봐”
“이렇게 계산하면…”
“그게 아니잖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력한 백 태클이 들어왔고,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만
신
창
이
여러 사람 앞에서 생전 처음 받아보는 날이 선 원색적 비난에 머릿속은 새하얘졌고, 흥분해서 얼굴이 시뻘게진 대표를 바라보며 ‘이게 이렇게 화를 낼 일인가?’ 싶으면서도, ‘이제 난 찍혔다’라는 본능이 보내는 신호에 마음속 폭풍이 일었어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가 벗겨져 몽둥이찜질을 당한 기분이었습니다.
누구 한 명 거들어 줬다면 조금 나았을까요?
하긴 대표가 미친 사람처럼 화를 내는데, 누가 감히 나설 수 있었겠어요.
대표의 논리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라고?’
어려운 주제라 차일피일 시간을 끌었다면 은근슬쩍 뭉갰을 수도 있었을 텐데,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셈이었습니다.
대략 2년 전 이야기입니다.
요즘 당시와 비슷한 일을 맡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기억이 떠올랐네요.
당시 패인을 분석해 보았습니다.
1. 먼저 1:1로 보고 했어야.
대표는 나르시시스트였습니다. 여럿 있는 자리에서 나를 밟으며 존재감을 뽐내게 하면 안 됐던 거죠.
2. 다방면으로 준비했어야.
못 알아먹을 것을 대비하여, 이해관계자 별 관점 등을 쉬운 예시를 들어 설명할 걸 그랬어요.
3. 사전에 내 편을 만들었어야.
회의 전 참석자들에게 내용을 충분히 납득시키고 지지를 받았어야 했습니다.
(큰 소용은 없었겠지만)
당시에는 괜히 나섰다가 회사 생활 망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그때의 제가 대견합니다. 과감히 시도했고, 그래서 살짝 성장했으니까요.
사진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