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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의 관용

내면에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은 나를 지탱해 주는 근섬유가 됩니다

by 이열

최근 주말 새벽, 한강변에서 러닝을 했습니다. 출발할 때는 기분이 좋아서 빠른 속도로 우다다다 달렸지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숨이 가빠지고 다리가 무거워졌어요. ‘조금만 더 이 속도로 가 보자’라고 스스로를 다그쳤습니다. 금세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머릿속에서는 자꾸 빨간 불이 깜빡였어요.


결국 본능이 시키는 대로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뛰기 시작했습니다. 발끝에서 전해지는 땅의 반발력, 귓가에 맴도는 규칙적인 숨소리. 서두르지 않고 한 걸음씩 내딛다 보니 몸도 마음도 차분해졌어요. 하지만 빨리 달리고 싶은 욕심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Km당 평균 5분 30초는 기록하고 싶은데, 이래서야...’


그러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빠르게 뛰다가 천천히 뛰는 걸 반복해도, 평균 기록이 괜찮게 나오지 않을까?’


원하는 속도를 계속 유지할 수 없다면, ‘더 빠르게’와 ‘더 느리게’를 반복하며 준수한 평균에 수렴하는 전략이지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연스럽게 인생에도 빗대 보고 싶었습니다. 러닝도, 인생도 지금 느리게 가고 있다고 조급해할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결국 꽤 괜찮은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성장의 속도가 달라질 때가 옵니다. 어떤 날은 내리막길에서처럼 가뿐하게 나아가는 기분이 들지만, 어떤 날은 오르막길 앞에 선 것처럼 한 발을 떼는 것도 벅찰 때가 있지요. 이럴 때면 스스로를 탓하기도 하고요. ‘나는 왜 이렇게 느릴까?’, ‘다른 사람들은 저만치 가고 있잖아?’ 남들과 나를 비교하며 초조, 불안해지는 순간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감정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빨리 뛸 때도 있고 천천히 나아갈 때도 있습니다. 전체를 보면 마땅한 속도인 거예요. 그리고 느리게 나아가는 시간이 있기에 지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는 법이지요.


저에게도 역시 느릿한 시기가 많이 옵니다. 그중 하나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직장 회계팀에 들어갔을 때예요. 업무 지식도 미미하고 엑셀도 처음 써 보는 상황에서, 빨리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습니다. 현업에 배치된 동기들은 벌써 결과를 내는 것처럼 보였고, 저는 뒤처진 기분에 스스로를 자책했어요.


어떤 날은 선배의 소소한 지적마저 크게 느껴져 ‘나에게 이 일이 맞는 걸까?’라는 고민에 휩싸였습니다. 매일 더 잘하려고 노력했지만, 정작 진전은 빨리 보이지 않았어요. 정체 속에서 자신을 의심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느린 걸음이 지금의 저를 탄탄하게 만든 단련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족함을 메꾸려, 끊임없이 야근을 하면서도 업무 관련 책과 인강을 놓지 않았어요. 서툴게나마 꼼꼼히 익혔던 지식과 기술이 결국 저의 뿌리가 되었고, 그 뿌리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으로 이어졌습니다. 성장은 눈에 보이는 속도만으로 판단할 수 없어요. 내면에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은 보이지 않지만, 내가 계속 달릴 수 있게 지탱해 주는 근섬유가 됩니다.


러닝을 하다 힘들어질 때면 천천히 뛰며 숨을 고르고, 체력을 회복하면 다시 속도를 올립니다. 빠름과 느림을 반복하면서 결국 목표에 도달하죠. 삶도 이와 같습니다. 빠르게 나아갈 때도 있고, 때로는 한 걸음씩 천천히 떼어야 하는 순간도 있지만 중요한 건 단 한 가지입니다.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성장해요. 지금 느리게 걷고 있다면, 내가 더 멀리, 더 단단하게 나아가기 위한 과정 중에 있음을 믿자고요.


아, 그래서 좋은 기록 나왔냐고요? 지난번 보다 평균 1초 단축했습니다. 작지만 귀여운 성장!




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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