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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선 누구나 철학자요 시인

by 힐링작가 김영희

독일 하이델베르크에는 철학자의 길이 있다. 수년 전 독일 하이델베르크를 여행한 적이 있다. 하이델베르크는 가장 목가적이요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하이델베르크 시내를 둘러보고 고성에 올라가서 강 건너편 언덕에 위치한 '철학자의 길'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때는 눈이 많이 온 날이어서 직접 '철학자의 길'에 가보지는 못했다. 눈온 날 고성에서 맞은편 언덕, 철학자 칸트며 대문호 괴테가 걸었을 철학자의 길을 바라만 봐도 감격스러웠다. 위대한 철학자나 대문호가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서 좋은 생각을 떠올리거나 영감을 얻은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철학자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많은 철학자와 문학가들이 그 길을 걸으며 숱한 고민을 하고 고뇌의 시간을 보냈으리라.


그들처럼 걷기를 하는 것은 단순한 다리 운동만 하는 것이 아니다. 머리와 마음에 많은 깨달음을 주고 폭 넓은 사색을 하게 해주는 것이다. 오늘 낮에는 40분간 산책을 하였다. 평소보다 10분 정도 더 시간이 걸렸다. 평소에 걷던 길에서 약간 벗어나 새로 만들어 놓은 다리도 건너 보고 다른 길로도 가보았다. 다른 길에선 눈녹은 물이 길을 막아서 돌아가야 했기에 시간이 좀더 걸렸다. 새로 만든 다리를 건너서 한참 가다가 보니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가 있어서 지레 겁을 먹고 뒤돌아서서 도망치듯 뛰어 왔다. 누구나 안 가본 길은 더 좋으리라 생각하고 가보고 싶고 호기심이 생기는 것이다. 막연한 동경과 호기심을 가지고 가보면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이런 난감한 일도 있고 예상치 못한 일도 생기기도 하는 모양이다. 다리 입구에 오래 된 나무가 비스듬히 쓰러져 있다. 뿌리를 반쯤 드러내었는데 반쯤은 물가쪽에 묻혀 있어서 죽지는 않은 채 비스듬히 누워있다. 그 모습에서 사람의 일생을 떠올리게 되어 쓸쓸함을 느꼈다.


한참을 걷다가 빈의자가 자리잡고 있는 언덕에 올라가 보았다. 절벅절벅한 물길도 밟아 가면서 갔다.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 가서 앉아도 보니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다. 조병화 시인의 '빈의자' 시도 생각났다. 내가 방금 앉았던 이 자리도 다음에 올 누군가를 위해 비워 놓고 가야겠구나. 빈의자는 그 자리에 늘 자리하고 있지만 앉을 주인은 바뀌겠지. 바뀔 때마다 빈의자는 따스한 온기를 나누며 앉았던 사람들의, 사색의 노트를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공원엔 죽은 나무들이 많다. 죽은 나무들을 가만히 살펴 보면 겨우살이가 많이 달려 있다. 겨우살이 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은 겨우살이에게 영양분을 다 뺏기고 자신은 시름시름 야위어 가다가 끝내는 고사목이 되고 만다. 한국엔 겨우살이가 깊은 산속에나 가야 있어서 그걸 따다 차로도 끓여 먹고 하는데 미국에서는 주택가 인근 공원 나무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바람에 떨어진 겨우살이 열매들이 작은 진주가 쏟아진 것처럼 바닥에 흩어져 있다.


산책길 끝자락에서 만난 민들레꽃들은 며칠 전의 폭설과 영하의 날씨에 죽살이 치다 되살아난 푸시시한 얼굴을 내민다. 옆에는 냉이꽃이 피어 있다. 한국의 냉이와 모양은 비슷한데 향기도 없고 뿌리도 가늘어서 먹을 수 없는데 왜 이렇게 반가운지 모르겠다. 산책길에서 만난 풀꽃들이 아직도 저만치 먼 봄인사를 먼저 보내고 있다. 집 가까이에 있는, 자연탐방을 하며 걸을 수 있도록 꾸며진 산책길은 내겐 사색의 보물 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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