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전쟁, 때로는 여전히 비현실적이고 거짓말 같은 지독함
2022년 2월 24일,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날이 된 그 날,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오후에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그 말이 나왔다.
러시아가 국경을 넘어 우크라이나에 대한 ‘특별 군사작전’을 시작하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 뉴스를 본 나는 한동안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꿈 치고는 너무나 생생하지 않은가? 만우절은, 아직 멀지 않았나? 등 넋빠진 생각을 하며 스스로의 뺨을 한 대 세게 때려 보았다. 사무실 주위의 동료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고, 옆에서 다른 회의에 집중하고 계시던 팀장님 또한 헤드셋을 잠시 벗으시고 무슨 일이냐고 내게 물으셨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대답 대신에 그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도 제대로 된 말조차 나오지 못한 채 나는 모니터 앞에서 러시아 헬기가 우크라이나 상공을 비행하고 있는 뉴스 장면을 가리켰고, 팀장님과 팀 동료들의 얼굴도 그렇게 굳어 갔다.
입을 가리고 놀라는 사람도 있었고, '어떡해요'하는 소리도 이따금씩 들렸던 것 같다. 멈춰 있던 나를 보며 팀장님께선 나에게 일단 먼저 얼른 집에 돌아가 보라고 말씀하고 채근하셨다.
정신이 나간 채로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집에 가는 지하철을 타고, 4호선으로 갈아탄 때에 불현듯 사실은 이게 진짜가 아닌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헛웃음도 내뱉아 보았다.
그러다가도 분 단위로 업데이트되는 속보들을 보면서 이게 21세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아니면 나 자신이 연관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전 세계 어딘가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며 영토 분쟁을 위해 다투고 있는데 외면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지금의 현실은 현실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초현실적이었다. 그때의 심정을 지금에 와서 비루한 언어로 표현하자면, 정말로 무엇에 홀린 듯이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어가며 그렇게 집에 도착해 문을 열었던 것 같다.
내심, 이 모든 게 사실 연출된 거짓이기를 희망하고, 사실 러시아군의 현장감 넘치는 위협을 보여줬을 뿐이며 이제는 다시 다 돌아갔다고 말하며 아내가 반갑게 맞아주길 헛되게 기대하면서.
물론, 현실은 더할 나위 없이 11월의 칼바람처럼 차가웠다. 아내는 우크라이나의 자포리자주의 주도인 자포리자 사람으로, 이미 전시 방송체제로 전환한 우크라이나 방송국의 유튜브 채널을 TV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당시 2살 된 첫째가 무슨 상황인지 몰라 장난감을 갖고 놀아달라고 보채고 있었음에도, 아이보다 뉴스에 더 집중한 두 눈을 필사적으로 감지 않으려는 아내를 보며, 나 또한 그제야 지금 일어나는 이 모든 것은 죽을 만큼 아픈 참담한 현실임을 깨닫고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입원하셨던 모습을 본 이후로 가장 세차게 울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채널 속에서 중계되고 있는 참수 작전, 격추당하고 있는 러시아 헬기, 국경을 넘는 러시아 기갑부대의 영상, 우크라이나군이 어떻게든 반격을 하며 열악한 환경에서도 맞서 싸우는 장면들. 전쟁, 삶에 있어서 가장 멀게 느껴진 그 단어.
그랬다. 특별 군사작전의 이름을 뒤집어쓴, 전쟁이란 시간은 그렇게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와 버렸다.
눈물을 흘리고 있던 나를 보며 아내는 가장 힘든 게 자신이었을 것임에도 내 어깨를 붙잡고 다그쳤다.
지금 당신이 이렇게 운다고 일어난 현실이 바뀌는 건 아니야. 나는 어머니를 피난시킬 수 있게 방법을 찾아볼 테니 당신은 대사관을 알아봐 줘.
그만 울어. 나한테 필요한 건 울고 있는 나를 달래줄 당신이지 나와 똑같이 행동할 그 남자가 아니니까.
회사는 이미 내 아내가 우크라이나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물론 당시가 아직 코로나 시기기도 했기에 재택근무를 병행하고 있긴 했지만 당분간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출근하지 않고 아내 옆에서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 동안, 우리는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는 불안감에 서로가 번갈아 가며 눈을 잠시 감으며 그저 이 상황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내일이 오면 그저 이 모든 상황이 끝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어느 날은 우크라이나군이 호스토멜 공항에서 러시아군을 격퇴했다는 뉴스에 기뻐하다가, 남부 전선이 완전히 밀려 버리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였다. 차례로 도시가 점령당하고 있다는 소식,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뉴스 하나, 속보 하나 놓치려 하지 않았다.
아내의 고향인 자포리자는 우크라이나 남부에 있는 도시로, 전쟁 발발 이후 크림반도에서 밀려오는 러시아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자포리자 주 전역을 유린했다. 다행히 처가인 자포리자주의 주도인 자포리자까지 점령당하지 않았지만, 전선은 불과 30km 남짓까지 닥쳐왔기에 우리는 항상 불안했다. 나는 장모님을 피난시키고 싶었고, 장모님께서 받은 문자 한 줄에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아들아, 간호사로서 전선에 나가진 않아도 계엄령 때문에 출국이 어려울지도 모르겠구나.
그래도 걱정하지 말거라. 신이 우리를 지켜준다면 언젠가 살아서 기쁘게 너희를 만나러 갈 수 있을 것이니.
러시아가 기어이 우크라이나를 집어삼키려 하지만, 우리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아마 그때의 나는 조금은 일어나면 이 모든 게 꿈이길 기도하며 살았던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장모님의 그 말씀이 더없이 현실적으로 나를 일깨워 버렸던 것 같다. 지금 보이는 폭격도, 가끔 장모님께서 내려가시던 방공호도, 전기 공급과 통신망이 원활하지 않아 이따금씩 연락이 끊기곤 하는 그 순간들은, 거짓이 아닌 받아들여야만 하는 참혹한 현실이었다.
다행히 강한 정신력을 가진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세상의 기대보다 더 오랫동안 나라를 지켜 주었고, 전황이 대치 상태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장모님은 출국금지 대상에서 제외되어 전쟁 발발 후 2달 뒤에 우리는 장모님을 한국으로 모셔올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우리의 기대보다 오래 계셔 주시지 못하고 몇 개월 뒤 다시 돌아가셨지만, 그리고 그 시간에 아내의 정신적 소모가 상당히 극심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몇 개월 동안 우리는 어머님을 우리 안에서 지켜낼 수 있었음에 많이 안도했던 것도 사실이다.
시간은 그렇게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버렸다. 물론 여전히 나와 아내는 소강기에 접어들어 요즘은 잘 접해지지 않는 전쟁 소식을 때로 참혹하게 전해 듣게 된다. 한국에서 볼 때야 별 일이 아닌 것처럼 대치 중이겠지만, 우크라이나에는 여전히 공습경보가 울리고, 날아온 미사일에 나와 아내가 잘 알던 건물이 폭격당해 불타고 있는 모습을 봐야 하고, 그렇게 우리가 쌓았던 추억이 하나씩, 하나씩 조각나야 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남겨진 그들을 대신해 똑같이 아파하려 하지 말고, 더 올바르게 살아가며 언젠가 올 이 전쟁의 종결에, 그때 남은 사람들과 다시 시간을 함께하며 보답하기 위해서 더 잘 살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이제 그런 현실을 목도해도 주저앉으려 하지 않고 서로의 등을 부축하며 앞으로 걸어가려 한다.
우리의 미래는, 지금의 현실을 발 딛고 일어난 더없이 단단해진 믿음 위에 올려져 있을 것을 믿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