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까지 우리의 아침 준비과정까지 상세하게 적기엔
특별한 해프닝 없이 지나가는 바람에 생략하겠다.
때맞춰 일어나서 잘 준비하고 체크아웃을 마쳤다.
이곳에서의 투숙은 가격과 위치를 고려하면 괜찮은 선택이었다.
직원들도 친절하고, 보증금을 체크아웃과 동시에 승인취소 해준다.
초반에 묵은 다른 호텔들 보증금을 3~5 영업일로 기다려야 하는 것과는 달리
바로바로 들어오니까 마음이 보다 편하다.
해외 호텔들은 우리나라처럼 전산 일처리가 깔끔하지 못해서
현장에서 모든게 해결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메리트이다.
그리고 가장 큰 장점은
공항까지 운행하는 무료 셔틀버스가 있다.
아침 8시에 셔틀이 있어서 변수를 대비하여 7시 50분까지 정류장으로 갔다.
역시나, 8시 5분이 지나도 오지 않는 버스.
이놈의 버스들 정말 마지막까지 이럴거야.
계속된 사건들로 인해, '기다리면 오겠지' 같은 속 편한 생각은 갖다 버린 지 오래다.
바로 호텔 로비로 돌아가 셔틀버스가 왜 오지 않는지 물었다.
곧 올 겁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조금은 이미 기다렸는데...
뭐, 오는 것만 맞다면 기다릴 수는 있지.
3분 남짓이 더 지나고 드디어 셔틀이 왔다.
그런데 기사가 어디서 본 얼굴인데.
조금만 기다리세요 를 말해준 직원 옆에 있던 직원이잖아.
나랑 프로도는 그 셔틀이 공항 인근 호텔들을 순회하는 공용 셔틀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우리가 숙박한 호텔에서 전용으로 운영하는 셔틀이었다.
그래서 로비에 있던 그 직원이 그대로 나와서 운전대를 잡은 것.
그런데 도대체 왜 늦는건지는 의문이지만
이제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괜찮다.
알아서들 하세요. 나는 떠납니다. 정시출발의 나라로.
우리의 무거운 캐리어를 실어주며 괜찮다고 했지만
한순간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까지 숨기지는 못한 호텔의 직원 겸 기사님의 셔틀을 타고
뒷자리에 함께 탄 흑인 할아버지의 흥이 넘치는 스몰토크 (치고는 과해서, 빅-토크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
쉴 틈 없이 듣다보니 어느새 공항에 도착했다.
캐리어를 내릴 때도 미세하게 떨리던 이두박근을 가진 기사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뒤에서 '흑인은 무반주에 말만 빠르게 해도 랩이다'를 실감하게 해주신 (인종차별 아닙니다.)
할아버지께 'Have a nice trip' 한 번 날려준 다음에서야 공항 문을 통과했다.
몇 개 구매하지는 않았지만, 하나같이 무게가 있는 것들이다보니
괜시리 무게제한을 넘을까 마음을 졸였다.
다행히, 23kg 중에 22.6kg를 채우는 기염을 토하며 수속까지 문제없이 통과하였다.
이제 마지막 비행까지는 2시간 정도가 남았다.
딱히 할 게 있는건 아니라서, 공항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우선 아침을 아직 먹기 전이기 때문에 식당을 찾았다.
몇 가지 프랜차이즈 음식점이 푸드코트 형식으로 있었고
프로도는 마지막까지 '비리아 타코'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지만
애석하게도 LA 공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이미 두 번을 먹은 판다 익스프레스와
글로벌 체인 KFC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불현듯 KFC 의 비스킷 스콘에 꽂혀 결정을 내렸다.
꽤 많은 대기인원을 기다리고 받은 치킨버거와 비스킷은
미국 LA라고 특별할 것 없이 그냥 아는 그 맛이었다.
다만, 한국에서는 비스킷을 시키면 딸기잼을 주는데
LA공항 KFC는 딸기잼을 주지 않는다.
비스킷을 먹는데 딸기잼을 안 준다고. 그럼 뭐랑 먹어.
우리는 그저 감자튀김을 위한 케찹을, 비스킷에게도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감자튀김의 양해는 얻지 않았다.
비스킷과 케찹의 조화는 따라하지 않은 것을 추천한다.
애초에 한국에서는 딸기잼을 주니까 따라할 사람도 없겠지만.
미국 KFC에 오뚜기 딸기잼을 연결해주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뒤로한 채
뒷정리를 하고 면세점 구경으로 넘어갔다.
딱히 살 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남은 달러 잔돈을 처리할 만한 간식거리 조금과
다른 상점에서 보지 못한 특이한 것이 있는지 보는 정도.
90% 할인 팻말이 보였다.
90%? 그것도 공항에서?
솔직히 90% 할인 팻말을 보고, 오픈형 매장에 눈길조차 주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보라.
나와 프로도는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대체 뭐가 90%나 할인한다는 거야.
카밀라 해리스 굿즈 : 최대 90% 할인
그럼 그렇지. 이게 대체 무슨.
하긴, 일단 만들어놓은 굿즈를 버리는 것보단 낫나.
기가 막히게 (혹은 당연하게도) 도날드 트럼프 당선인의 굿즈는 조금의 할인도 용납하지 않았다.
딱히 지지하는 바는 없으나 혹시 숨겨진 꿀템들이 있는지 둘러봤지만
그럴수록 왜 90% 할인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납득만 갈 뿐이다.
여행을 이곳저곳 다니며, 나름의 수집하는 기념품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현지 종이신문.
내가 여행하는 시점에 어떤 일이 있는지 영원히 기록할 수 있기에 꽤나 괜찮은 기념품으로 선택되었다.
LA - 라스베가스 여행을 하며 이렇다 할 신문을 구하지 못했었는데
마지막 공항에서야말로 신문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잡화점으로 들어가 신문을 찾았다.
'LA타임즈' 신문 한 부를 결제했다. 한국에서의 종이신문은 1000원 남짓인데,
미국 종이신문은 $5 (약 7000원) 정도로 값싸지 않은 편이다.
홈리스들이 신문이 아니라 박스를 덮고 자는 이유가 있구나.
남은 지폐와 동전을 털어 신문을 구매하고 있을 때
프로도는 어딘가 구석에서 잡지 하나를 가져오더니
계산대에 올려놓으며 나와 동일한 LA타임즈 한 부를 추가했다.
하하. 프로도, 내 기념품이 괜찮아 보였구나.
그런데 그 잡지는 뭐야.
이거? 스도쿠 모음집.
프로도가 구매한 스도쿠 모음집은
약 150개의 스도쿠 문제들이 잔뜩 있었다.
LA행 비행기에서도 기내 엔터테인먼트에서 열심히 스도쿠를 풀던 프로도.
나도 스도쿠에 한때 빠져있기도 했지만
프로도가 이 정도로 스도쿠를 좋아하는지는 몰랐다.
14시간의 비행 동안 이 스도쿠를 모두 풀겠다고 선언하는 프로도에게
'한 문제 당 4분 안에 풀면 가능해' 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첨언을 곁들었다.
이런저런 상점을 더 구경하고
화장실에 갔다가 탑승 게이트 앞에 자리를 잡았다.
비행기가 약 20분 정도 지연되었다.
문제는, 연착된 도착 예정시간이 19시 30분이었는데
내가 예약한 공항버스도 19시 30분이었다는 것.
원래 이렇게 빡빡하게 잡는 편이 아니지만
예정대로 연착되지 않고 도착했다면 19시 전에 도착이라 어느정도 여유가 있었고,
무엇보다 20시 이후 공항버스가 전부 매진이었다.
진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스들이 날 괴롭히네.
이러다가 다 와놓고 인천에서 집까지를 못 가는 것 아니야?
그나마 다행인 점은
19시 50분 버스에 빈자리가 1개 생겼다.
곧바로 기존 버스를 취소하고, 19시 50분 버스를 예약하였다.
제발. 19시 50분거는 탈 수 있어야 할 텐데.
그 이후로는 별다른 문제 없이 탑승하였다.
나의 <재활>이 끝났다는 실감이 이제야 스멀스멀 나고 있었다.
이륙을 준비하는 동안, 슬리퍼로 갈아신고 담요를 덮고
14시간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보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준비를 했다.
그래봐야 이코노미이지만.
이미 프로도는 스도쿠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야 야, 너 어차피 이륙할 때 테이블 접어야 돼.
드디어 이륙.
나는 이제 LA와 라스베가스, 그랜드 캐니언에 남긴 흔적을 뒤로하고
그 어디보다 나의 흔적이 많은 대한민국 분당의 모처로 간다.
미리 다운받았던 영화 하나를 틀었다.
이거 왜 영어 자막이지.
자막 설정에 들어가 한국어를 찾았지만 없었다.
알고보니, 미국에 있을 때 다운받았던 콘텐츠라서
한국 넷플릭스에는 없는 콘텐츠였던 것이다.
그러니 한국어 자막 패치가 되었을 리 없지.
20분 정도 영어 자막으로 최대한 이해해보려 했지만
안그래도 피곤한 귀국자에게 마지막까지 영어 자막으로 공부하라고 하는 것은 가혹하다.
하품을 세 번 정도 하고, 핸드폰을 뒤집고 덮고 잠을 청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장거리 여행에서 귀국하는 비행기에서는 정신없이 자기만 했던 것 같다.
수면의 질이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시간은 잘 간다.
뒤에 앉은 승객이 기내 스크린 터치를 너무 강하게 해서
계속 깨면서 방해받아 굉장히 힘들었지만, 꾹 참았다.
기내식 두 번과 간식 한 번을 먹었다.
그 사이 사이의 시간동안 나는 기내 영화들을 시청했고
프로도는 꾸준히 스도쿠를 풀었다.
비행이 5시간 정도 남았을 때 어느새 33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9시간에 33개. 역시나 150개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 시간 동안을 계속 숫자놀이를 하고 있다는 데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당신의 집중력에 박수를!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비행도 결국 막을 내렸다.
이와 동시에 나의 <재활>도 결국 막을 내렸다.
안전하게 착륙에 성공하였고
입국수속을 밟고, 짐을 찾고,
완료된 시간은 다행히 19시 40분이다.
19시 50분 버스를 타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고
프로도와 순식간에 인사를 하고 수고했다는 이야기를 나눈 뒤
각자의 집으로 이동시켜 줄 교통수단을 향해 질주했다.
예상치 못하게, 다소 급하게 헤어졌지만
생각해보니 프로도와의 여행 시작도 예상치 못한 급함 속 이루어졌다.
어차피 조만간 또 볼테니까. 고생 많았다.
19시 50분 버스에 잘 탑승하였고
달리고 달려 드디어 집에 도착하였다.
일요일 밤 9시에 집 도착한 나는
10시간 후에 출근해야 하는 몹쓸 현실에 저항하느라 힘겨운 밤을 보냈다.
기념품을 정리하고, 다음날 회사에 출근하고,
사 온 초콜릿이 금방 동나는 인기에 괜시리 뿌듯했다.
실수로 위스키가 함유된 봉봉 초콜릿을 샀는데
알코올이 함유되어 더욱 인기가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여행기를 남긴다.
이렇게, 나의 <재활>은 완결이 났다.
나는 이제서야 이 재활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럼으로서 나는 마지막까지 즐길 수 있었다.
당당히 일어서며 단단해졌다.
그러나 감히 이 재활을 '성공'이라 단언하지 않겠다.
그 이전의 경험들이, 고통의 시간들이 '실패의 시간들'은 아니었으므로.
그 또한 재활의 과정이자 일부였으며, 경험이었다.
크고 작은 시련을 극복하며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 일.
그것이 여행이고 재활이라면, 곧 인생이지 않을까.
남겨진 이는 울지라도, 떠난 이는 행복해야 한다.
언젠가 다시금 무너지는 그 날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극복의 경험으로 몇 번이고 일어설 준비가 되어 있다.
표류하는 우리의 인생처럼
<재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의 <재활>이 당신의 재활이 되기를.
그러길 바라며 이 장황한 여행기를 마친다.
그 동안, 나의 <재활>을 함께해 준 프로도와
글을 꾸준히 읽어주는 일부 독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언젠가 다시 시작될 여행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