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재활>은 막바지에 다다랐다.
온전한 하루를 즐길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밝았다.
다른 날보다 조금 늦게 시작한 하루.
수건을 예쁘게 잘 접어주는 호텔을 떠나
공항 인근의 호텔로 옮기기로 했다.
체크아웃 후에, 한 시간이 넘게 이동하여 호텔에 도착하였다.
말이 호텔이지, 전형적인 서부 대형 모텔 느낌이다.
낮 12시에 도착했는데도 얼리체크인을 해주었다.
다행히 우리는 짐을 풀고 다시 여정을 떠날 수 있었다.
체크인을 하며, 보증금을 내고, 여러 스몰 토크 Small talk 를 하며
고양이 이야기가 나와 내 동생 '산이'를 보여줬다.
만화에서나 보던 표정으로 'So Cute~' 를 말하던 직원의 표정이 괜시리 뿌듯함을 더했다.
오늘 우리는 LA에서도 서쪽에서의 일정을 잡았다.
캘리포니아 서쪽은 지금까지 다녔던 곳들보다는 대중교통이 잘 되어있지 않다.
조금 오래걸리더라도 지하철과 버스가 어느 정도 되어있는 동북쪽 구역과 달리
서북 지역은 우버가 아니면 시간 내에 돌아다니기 힘들다.
이렇게 말하니 마치 삼국지 같은 느낌이...
첫 번째 목적지는 '장 폴 게티 미술관' J. Paul Getty Museum
통칭 게티 센터라고도 불린다.
엄청난 부자 '장 폴 게티'가 지은 갤러리인데
가장 큰 특징은 무료이다.
사전 예약이 필요하다는 글이 간간히 있는데
딱히 예약하지 않아도 입장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아마 지금은 비성수기라서 사람이 없어 그럴지도.
공항 (사진 최하단)에서 우버를 타고 한참을 가면
11시 방향에 게티 센터 초입에 내려준다.
거기서 무료 트램을 타고 한참 올라가면 드디어 미술관 건물이 보인다.
굉장히 감각적인 유선형 디자인의 은색 건물은
딱 봐도 돈 많은 사람이 지은 티가 났다.
다른 블로그들을 보면 사람이 항상 많던데
비성수기 여행은 역시 장단점이 명확해.
사람이 없는 건 좋은데 가끔 보수공사를 하는 곳이 있단 말이지.
사진 몇 장을 찍고, 건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이 시점에서 프로도는 5장 중에 3장을 건지는 실력이 되어 있었다.
성공률이 무려 60%.
에이, 끝날 때 되니까 잘하는구만.
케티 센터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의 Irises (1889)
고흐가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에 있는 꽃을 보고 그렸다고 한다.
아이리스에는 여러 버전이 있는데
그 중 한 개의 작품이 게티의 메인작품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따로 특별 전시관을 만들어
아이리스에 여러 빛을 비추어보고 분석하고 현대식으로 복원해보는 그런 전시가 있었다.
전부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대단하다는 것 정도는 눈치껏 알았다.
그 인기를 증명하듯 게티 센터의 기념품 샵에는
아이리스를 바탕으로 하는 여러 물건을 팔고 있다.
심지어 앞치마까지.
그 다음은 모네의 Jeanne (1881).
세잔의 Still Life with Blue Pot (1900).
램브란트의 자화상, Rembrandt Laughing (1628)까지.
이외에도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작가들의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림들 수백 개가 걸려있다.
이 모든 작품을 전부 관람하려면 적어도 4-5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는 그 정도 시간은 없었기 때문에
주요 작품을 위주로 2시간 남짓 관람하였다.
어쩌다 길을 잃어 가게 된 옥상에서 보이는 LA 시내 전경은
매번 경험하던 동부 뉴욕의 마천루와는 또 다른, 평화로운 매력이 있었다.
좋은 날씨에 좋은 그림들.
기념품 샵에 들러, 주요 작품의 엽서 몇 장을 구매했다.
프로도는 주요 작품이 잔뜩 담긴, 100장의 엽서 세트를 구매했다.
너, 언제부터 그렇게 예술에 조예가 깊었는데.
한 개에 $3인데, 100장 짜리가 $20 이니까.
사실 나도 잠시 유혹당했지만, 100장씩은 필요가 없기도 하고
나는 동일한 엽서가 여러 장 필요했던 것이라 눈길을 돌렸다.
아쉽지만 이제는 떠날 시간.
산타모니카 해변 Santa Monica Beach 에서 노을을 봐야하기 때문이다.
트램을 타고, 우버를 타고,
산타모니카 해변으로 가주세요.
해변에 도착하면 정확하게 노을이 지기 시작할 때에 도착하겠군.
산타모니카 해변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LA 여행을 준비하기 전에도 이름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어디서 사진이라도 본 적 있는 것도 아닌데
내 본능은 반드시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노을을 보아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고
프로도는 이에 동의하지 않을 이유를 못 찾았다.
산타모니카 해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구역은
산타모니카 Pier 일 것이다.
66번 국도 표지판이 있는 바로 그 데크.
길을 찾을 필요도 없이, 그냥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면 된다.
딱 노을이 시작될 때 도착하였다.
그 유명한 표지판에는 역시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무슨 줄인지 물어보는 사람이 있나?
당연히 사진을 찍으러 늘어선 줄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사람이 많은 건 아닌 것 같아.
여기까지 왔는데, 한 장 찍고 가야지.
5분 남짓을 기다리며 사진 전략을 세웠다.
우리 뒤에도 사람이 꽤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찍고 나와주고 싶었다.
이렇게 저렇게, 촤촤착 하고 자리 바꾸고.
프로도와 잔뜩 상의를 하고 우리 차례가 되었다.
프로도, 들어가. 찰칵 찰칵.
다음. 자리 바꿔. 그대로 찍으면 돼.
찰칵 찰칵. 왜 안 찍어?
뒤에 다른 사람들이 있어.
무슨 소리야. 뒤에 사람이 어딨다고.
지난 유니버셜 스토리에서 했던 말인데
이 망할 특정 국가의 관광객들은 줄을 서 있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
혹은 이해했지만 애써 무시하는 것인지 (높은 확률로 후자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줄을 서서 사진을 찍고 있음에도 반대편에서 비집고 들어와 자기들의 사진을 찍는것이 아닌가.
어이가 없네.
Hey, Here is the cue. Plaese keep the line.
들었는지 아닌지, 대꾸도 하지 않고 꾸역꾸역 한 장을 더 찍고 사라지는 사람들.
뭐 어쩌겠어. 참아야지. 후.
우리의 빠르게 찍어주고 사라지는 전략은 누구들 덕분에 망가졌지만
그래도 나와 프로도를 함께 찍어달라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두 장 정도 찍고 이제 우리도 마음놓고 자리를 비켜줬다.
땅하고 가까워질수록 역설적으로 차가워지는
눈부신 주황색 원점은 중력의 영향인지 내려오는 속도가 갈수록 빨라진다.
노을은 한 번 시작되고 나면 금세 모습을 숨긴다.
마치 타임어택을 하듯, 빛의 마지막 몸부림을 최대한 눈과 카메라에 담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데크의 끝까지 걸어가면서 좌우에 진열된 수많은 노점상들 구경을 했다.
기념 마그넷들이 대부분이었고,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나 후드티 등등
여느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잔뜩이었다.
마그넷은 하나에 만 원이 조금 넘었지만 흔치 않은 디자인이 있어서 하나 구매했다.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 어울리는 파스텔톤 포스터 디자인. 비싸지만 나쁘지 않아.
곳곳에 노래 버스킹하는 사람들을 지나,
데크 끝에서 노랗게 물들어가는 망망대해 사진을 한 장 찍고 이제 다시 돌아나와서 해변가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사진이 예쁘려면, 모래사장이 같이 나와야지.
몇몇은 돗자리를 깔고 해변가에 앉아서 노을을 보더라.
그 근처에는 갈매기로 추정되는 새 몇 마리가 노을 구경을 하고 있었다.
우리도 그 행렬에 동참했다.
파란 하늘에, 더욱 파란 바다.
그 사이를 메우는 주황 어스름한 빛깔.
이 광경을 '장관'이라 부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나와보라.
나는 그랜드 캐니언에서 일출을
산타 모니카에서 일몰을 본 적 있는
흔치 않지만 또 은근 흔한 듯한 여행객이 되었다.
태평양 반대쪽의 파도를 마주하며
여행의 마지막 날을 마주하며 잠시 여운에 잠겼다.
지금 이 일몰은, 오늘의 해질녘이자 여행의 석양이며 재활의 황혼이다.
여운을 끝낸 것은, 사라진 태양과 함께 등장한 배고픔.
하긴, 배고를 때가 됐지.
점심에 뭘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나네.
무엇을 먹을 지 미리 계획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식당에 대한 계획이 없는 여행은 처음인데.
그제서야 네이버 블로그를 켜고 검색을 해보던 중에
부바 검프 BUBBA GUMP 가 맨 위에 나왔다.
어라, 나 이거 들어봤어.
여기도 '핫 앤 쥬시' 처럼 새우 파는 곳인데
산타모니카 근처에서 가장 유명한 것 같아.
부바 검프를 가보자.
음식 선정에 있어서는 P 가 되어버린 우리는
곧장 부바검프로 향했고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이 식당은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모든 테이블에 'Run Forrest Run'이라고 적힌 파란색 표지판이 있고
이 표시는 점원을 부르는 표시이다.
점원이 다녀가서 용건이 해결되면, 표지판을 넘겨 빨간색 Stop Forrest Stop 으로 표시한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이렇다.
우리는 창가 바로 옆 자리를 얻었다.
그냥 손 들고 점원을 부르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해외에서는 그걸 굉장히 무례하게 여긴다.
그래서 항상 점원을 부르고 싶어도 눈치를 보며 눈을 마주치길 바래야 하는데
이렇게 표시할 수 있는 시스템은 아주 한국인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미국 서부' 그 자체였다.
목재 오두막 인테리어에 덕지덕지 붙은 스티커와 표지판
당장에라도 가게 앞에 말을 탄 카우보이가 올 것만 같은
그곳에서 우리는 창가 근처에 앉아서
이제 어스름 노을이 남은 파도가 파란색에서 까만색으로 변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배고픈 우리는 사실상의 마지막 식사이니만큼 넉넉하게 메뉴를 주문했다.
코코넛 새우튀김과 케이준 양념 새우는
라스베가스 핫 앤 쥬시에서 먹은 그것과 비슷한 듯 오묘하게 달랐다.
무엇이 더 맛있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둘 다 맛있었다.
머리를 잃어버린 좀비 새우들을 다시 잔뜩 먹은 뒤에
현금으로 팁을 넉넉히 얹은 후에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제는 충분히 어두워졌고, 배도 부르고.
호텔로 돌아갈 시간이다.
나오는 길에 멀리 보이는 대형 천막에 조명이 켜져 정체를 드러냈다.
태양의 서커스 CIRQUE DU SOLEIL , KOOZA
그 유명한 태양의 서커스가 여기에도 있구나.
태양이 지고 나서 시작되는 태양의 서커스라니.
후에 알고보니까, 매번 하는 공연이 아니라 40주년 특별 공연으로
24년 10월부터 25년 1월까지만 기간 한정으로 하는 거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시간도 돈도 없는 우리는 할 만큼 했다.
다음에 온다면 그때 도전해볼게.
약쟁이 홈리스를 만나지 않는다면 LA에서의 하루를 온전히 마무리했다고 볼 수 없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버스에서 내려 호텔까지 6분 정도 걸어야 하는 길에
늑대인간이 나와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음침한 분위기의 굴다리가 있었다.
아... 꼭 여기를 지나가야 해?
여기밖에 길이 없어.
이 굴다리 하나를 지나자고 우버를 부를 수도 없는 일.
다행히 큰 도로 옆이라 자동차는 많이 지나가고 있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조명이 몇 개 켜져있는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프로도와 나는 말없이 앞만 보고 잰걸음으로 갔다.
그렇게 그냥 통과했다면, 이 에피소드를 글에 쓰겠는가?
굴다리를 60% 정도 지나는 시점에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당연히 있을 줄 알았지만, 피할 공간도 없을 줄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숨죽이고 얌전히 옆을 지나가는 것 뿐.
다행히 그 할머니는 우리에게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어느 마트의 소유였는지 모를 커다란 쇼핑카트에 무언가를 열심히 담느라 바빠 보였다.
바로 옆을 지나가는 그 순간
스치듯 쳐다본 카트 안에는 흰색 포장지로 싸인 손바닥 크기 정도의 어떤 것이 잔뜩 있었다.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프로도는 '햄버거 할머니'라는 또 다른 별명 제조에 성공한다.
'송곳 할아버지'와 '지하철 좀비'를 잇는 세 번째 공식 닉네임이다.
그래도 다행히 그 모든 상황에서 아무일도 없었다.
그 사람들도 결국 사람이니까.
심성이 나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닐거야.
실제로, 우리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위험해 보이는 사람들은 알아서 잘 피한것도 있지만
몸과 마음을 가누지 못할 뿐이지 누군가를 해코지 할 기력도 없어 보였다.
너무 안좋은 시선으로만 바라본 게 아닌가 싶은, 가슴 한 켠의 미안함을 뒤로 하고 호텔로 향했다.
* 근데 니들이 먼저 위험해보이게 있었잖아!
호텔로 들어가기 직전, 맞은편에 있는 상점에서
마지막 밤을 기념할 수 있는 간단한 음식과 맥주 몇 캔을 구매했다.
첫 날 부터 비리아 타코 BRRIA TACO 를 찾던 프로도는
마지막에 들어간 타코 볼 집에서도 결국 비리아 타코를 찾지 못했다.
타코 맛집이 즐비하다던 LA에서 결국 맛보지 못한 비리아 타코는 프로도의 유일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나는 타코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프로도가 하도 맛있다며 찾아다니길래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넷플릭스에 '타코 : 국경을 넘어' 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거기에 LA편이 있고, 거기서 가장 맛있기로 유명한 것이 비리아 타코라고 했다는
LA 도착 전에 미리 이야기해줬으면 계획에 반드시 넣었을 것 같은 이야기를
귀국 전날 밤이 되어서야 해 줬다.
나는 그 짧은 다큐멘터리를 보며 입맛을 다셨고
왜 이걸 이제야 얘기하냐며 프로도만큼이나 아쉬움을 표했다.
아쉬운 대로 구매한 브리또 볼과 함께
RTD 칵테일 캔 몇 개를 구매하여
여행 전반에 대한 회포를 풀고,
각자 좋아하는 노래를 소개하며 마지막 밤을 보냈다.
프링글스 렌치 맛은 한국에 없는 맛이다.
어니언 사워의 상위호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드디어 내일,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간다.
이제 여행은, 재활은 마지막에 다다랐다.
이제는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끝나간다는 게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어떤 안도감을 느낀다.
어쩌면 나는 이미 준비가 된 것 같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많은 기대와 불안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 불안은 이제 잔잔한 평화로 바뀌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었다.
끝내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게 감사하다.
다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그걸로 충분할 것이다.
내일이 오면.